62. 칡 꽃이 태동하는 마을

60초 소설 62.

by 소요 김영돈


앙칼지다.

눈을 흘기면 더 짙어지는 보라색.

아카시아를 닮았다고 느슨하게 접근했던 것들은 모두 숨통이 끊어졌다. 늦가을 무서리가 내릴 때까지 놓아줄 수 없었던 것들을 생각한다.

엄동설한 한밤중, 달빛이 유리창을 두드리면 그제야 칭칭 감았던 손깍지를 풀었다. 오동나무는 태연하게 웃으며 갈색 넝쿨을 내려다본다. 고압선이 밤새 윙윙거리며 모두 태워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아도 버티던 잎새들.

겨울을 나는 동안 잎은 갈라지고 찢어지고 넝쿨은 뜯겨 나갔다.

산을 오르던 겨울바람이 얼어붙은 계곡으로 쏟아진다. 무너진 산자락에서 툭툭 금 가는 소리, 얼음 깨지는 소리. 소리를 따라 내린 뿌리 근처에 햇살 알갱이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겨울이 햇살의 기척에 소리 없이 떠난다.


뿌리가 기지개를 켠다.

세상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칡뿌리 꽃이 온 산자락에 필 것이다. 톱과 괭이를 들이대어 자르고 파본들 수맥을 향해 수직으로 박힌 뿌리의 마음이 보일까. 바위를 흠집 내며 깊이 뿌리내린 칡의 마음이 느껴질까.


엄동설한 한밤중에도 희끗하게 서 있던 오동나무 숲. 고압선이 떼로 으름장을 놓아도 넝쿨은 쉬지 않고 어디든 기어올랐다.


“다 덮어버릴 거야. 이름 없는 꽃으로 생을 버티며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보듬어 살 거야”

봄부터 가을까지 막무가내로 기어오르던 칡넝쿨이 실루엣으로 흔들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환청. 움찔 움찔 흙더미 사이 살얼음이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뿌리는 실눈을 뜨고 손깍지를 들어 기지개를 켠다. 사철 불면의 밤을 보낸 꽃을 피울 것이다.


우수 지나면, 뿌리는 벌레 가득한 밤나무밭으로 먼저 진입할 것이다. 그 따가운 가시밭으로 넝쿨을 보낼 것이다. 뿌리는 수맥 한 모금으로 천년을 살아낼 것이다.


사철

향기 없는 꽃으로

이름 없는 꽃으로

천년을 꽃피울 수 있도록.

<2026.2.18. 우수, 하거동 나드카페 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