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혜숙 씨의 봄비

60초 소설 64

by 소요 김영돈


영영 당신을 다시 못 볼 줄 알았다.

비극 희극 풍자 로맨스, 인생의 롤러코스트.


목숨을 걸고 얻은 아들을, 서른이 넘도록 끼고 싸우고 얼르고 달래며 친구처럼 애인처럼 키웠다. 교실을 휘저었던 수업시간들, 다시 태어나도 천상 선생인 나를 키운 건 8할이 아버지, 아버지가 떠난 후의 빈자리는 아들이 채웠다.


내생에 최고의 풍자, 남편은 낭만적인 겨울을 닮았다. 차가운 낭만을 녹여 초록을 틔운 것도 아들이다.

내 힘의 원천, 봄날의 광합성처럼 나를 빛내주었던 아버지의 부음은 내 인생의 겨울이었다. 다시는 당신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으로 그 비극적인 상실의 강을 건넜다.


후드득 바람이 비를 몰고 들판으로 내달린다. 다시는 당신의 생기를 못 볼 줄 알았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를 봄비가 적신다.


첫사랑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낭만은 가을이 두 번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었다. 로맨스, 로맨스... 빌어먹을 로맨스가 번진 곳은, 주님의 은총과 신 인류의 사랑 쪽이었다. 어쩌면 그게 하나님의 은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동창의 지어미가

'내 남편 같은 사람을 친구로 여겨

주셔서 감사해요'하고 말하던 날 로맨스는 끝났다. 다시 돌아온 40년째 겨울의 끝자락에 아들의 로맨스가 시작되었다. 아들이 이사를 떠난 다음날 손님처럼 봄비가 내렸다. 마지막 짐을 보내고 첫새벽 (3.1일 ), 당신이 창을 투둑 두드리며 노크한다.


"아들, 잘 잤니? 밥은,......"하고 아무 일 아닌 듯 일어서니 유리창에 빗방울이 듣는다.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나야, 고개 들어 눈물을 닦지 말고 나를 봐요. 흐르는 것은 그대로 흐르게 둬도 좋아요. 당신의 풍자와 로맨스, 희극과 비극을 모두 싣고 내가 여기 당도했어요'


'나를 보고 내 뒤쪽으로 아득히 오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봐요..

당신의 낭만과 로맨스가 움틀대던 곳에 꽃이 피어날 거예요'


혜숙 씨는 허기진 인생을 희극과 비극의 험산을 로맨스와 풍자의 보폭으로 넘었다.


대지에 초록이 움틀 대면 혜숙 씨는 눈을 감고 귀를 연다.


비처럼 음악처럼 그렇게 봄날의 전령이 고단한 혜숙 씨를 재운다.

가끔 진저리를 치는 그녀의 깊은 잠 속으로 아득한 지평선 너머 봄비가 내린다.


대지가 첼로의 선률로 움터온다. 생의 그리움들이 촉촉이 젖는다.


<2026.3.2. 우마주, ㅇㅇ숙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