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루에서 남긴 여행에 대한 단상

2026년 1월 오타루에서

by 버들

오야스미. 창 너머로 아쉬움 한가득 인사가 들린다. 오타루역이 마주보이는 호텔 침대에서 책을 읽다 들려온 소리에 고개만 죽 내밀어 바깥을 보았다. 이곳에 도착한 정오 남짓부터 눈은 계속 내렸다. 창밖의 사람들도 몇 시간 전 나처럼 모자에 목도리에 중무장을 했다. 제 키만한 눈 사이로 걷는 게 시뮬레이션 게임 같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오타루에 그렇게나 오고 싶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단지 좋아하는 영화에 나왔다는 이유여야 한다면 더 폴의 배경이 된 인도의 자이푸르나 서래가 휩쓸려간 삼척의 바닷가가 먼저여야 한다. 그 영화의 풍경들과 비교하자면 참 볼 것이 없다. 오타루라는 동네는 말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것만 같은 건축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치는 파도를 겪어낸 바위 무더기가 널브러진 처연한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무시무시하게 눈이 온다. 말도 못하게 와서 옷 밖으로 나온 피부란 피부는 다 얼어붙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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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서 건너오는 기찻길 옆의 바다는 영화처럼 아름다웠다. 차창의 바다를 오랫동안 비추는 <윤희에게>의 오프닝 시퀀스가 그 바다여야만 하는 이유가 과연 이해되었다. 반대로, <러브레터>와 <하츠코이>를 떠올리며 오른 후나미자카 언덕은 날이 흐려 제값을 못했다. 과장을 덜면 동네 언덕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그 앞에서 사진 찍느라 사람과 차량 통행이 방해된다 하니, 영화 한 편이 참 많은 걸 바꿔놓는다 싶다. 사람들은 왜 영화 한 편에 그리도 열광하는가.


사실 이건 나에게 돌아와야 할 질문이다. 영화가 뭐라고 바다를 건너 기차까지 타고 여기까지 왔는가. 눈오는 빙판에서 미끄러질 뻔하며 이 언덕까지 왔는가. 볼품 없는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보며 왜 기뻐하며 셔터를 눌러 대는가. 어쩌자고 도쿄도 오키나와도 아닌 오타루에 가장 오고 싶어 했는가... 따져 보면 하등 와야 할 이유가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그 영화들 때문에 나는 덜 냉소적이고 가끔 낭만적인 사람이 되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바라던 오타루에 오니 없던 낭만이 생겨난 것일까…?


우습게도 호텔에 서너 시간을 앉아 논문을 고치며 반나절을 보내야 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행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하기 싫어 죽던 일이 장소만 바뀌었을 뿐인데 기꺼이 해야 할 일이 되었다. 숫자와 표에 허덕이다가도 교차로에 건너는 사람들을 보면은 내가 이러려고 왔지 싶었다. “뭐하고 왔느냐”는 친구들 말에는 “논문 쓰고 왔다”며 짓궂게 답하겠지만 그마저 하나의 웃어 넘길 이야기가 될 테니 나로서는 행복한 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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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험하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머리로만은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몸으로 겪어야만 한다고 믿기도 한다. 그칠 줄 모르는 눈을 보고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눈이 언제쯤 올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처럼 눈이 언제쯤 그칠지 지난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겠구나. “영화가 생겨난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세 배 늘었다”는 말과 비슷하게, 여행한 뒤로 나는 두세 배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그러고 보니 이것도 영화 대사다).


어떤 시절엔 유튜브에 검색하면 골목골목을 다 보고도 남는데, 왜 돈과 시간을 들여 여행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리석었던 그때의 나를 이해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훌쩍 떠나보니 알게 되었다. 알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 삶도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나는 오타루에 왜 온 걸까? 아마 나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면 알겠지. 사진 찍으러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칠 줄 모르는 눈보라 사이에서 묵묵하게 자기 길을 가는 오타루 언덕 동네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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