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 북' 리뷰
실감하지 못하는 차별을 깨달을 때면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다 마는 느낌이 들곤 한다. 성소수자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랬고, 경증 장애를 가진 회사 선배의 불편을 알게 됐을 때 그랬다. 그런 경험에서 오는 세계의 확장은 부끄럼을 동반한다는 것도 어느새 체감하게 됐다.
생각해 보면 다른 국적을 가진 친구가 없는 나는, '이방인'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차별투성이인지 직접 들은 경험이 크게 없다. 오래전부터 인종 차별이 사회문제였던 사회의 역사적 기록과 영화 등의 문화적 변주로 대충 접하기는 했지만, 여느 소수자성이 그렇듯 유사한 논리와 감정을 지니고 있으리라고 가늠할 따름이다.
영화 '그린 북'(2018)은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젠체하는 우리에게 어퍼컷을 날린다. 1960년대 미국 흑인 이야기면 '거기서 거기겠거니' 하던 나의 근시안적 가늠이 무례하다고 말한다. "하나의 소수자성으로만 설명되는 사람은 없다"는 자명한 명제는 여러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일수록 잊기 쉬운 이야기다.
흑인 음악가 돈 셜리는 엘리트 부유층의 전형성을 보여 준다. 깔끔한 수트 패션에 카네기홀에 있는 화려한 집. '떠벌이 토니'와 극명하게 비교되는 언어 습관도 지극히 '신사적'이다. 피부색만 빼 놓고 보면, 그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나 싶어지는 지점들이다.
흑인 노동자가 사용한 컵마저 버릴 정도로 그들을 경멸하던 이민자 토니는 돈이 필요해지자 제발로 셜리 박사 밑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있는지 "수발은 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당대 미국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하얀 노예', '하얀 흑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사실. 그가 셜리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없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우리는 영화를 볼 수록 '피부색만 빼 놓고' 볼 수 없게 된다. 셜리가 가진 신사로의 자존심은 미국 내륙 백인들에 의해 한없이 구겨진다. 화려한 연주 장소와 비견되게 '그린 북'에 수록된 숙박 업소와 식당은 낡고 어두운 곳 투성이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데서 오는 아픔은 날 때 부터 결정된 피부색에서 비롯될 뿐이다.
초록색 책이 담은 분노와 슬픔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분출된다. 태어나 보니 흑인, 태어나 보니 같은 성별의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던 셜리는, '전통'과 '규칙', '명분'을 이유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하나 이상의 소수자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설움이, 쏟아지는 대사를 통해 마음에 꽂힌다.
토니 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셜리가 합류하며 마무리되는 엔딩 씬에서 '환대'란 무엇인지 생각한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환대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이 세상에 왔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를 맞이한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토니와 그 가족에게 피부색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자리'를 내 주었을 뿐. 그 크리스마스 저녁엔 차별도, 혐오의 논리도 작동하지 않았다.
얼마 전 다녀온 퓰리처상 사진전에서 본 사진이 잊히지 않는다. 흑인과 백인이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후 첫날의 모습을 담은 사진. 텅 빈 교실에서 손을 맞잡은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 뒤로 새어 들어오는 광채는 마치 축복의 빛으로 보였다. '너희가 내 뜻을 이뤄가고 있구나' 하는 신의 은총 같았달까.
지금 우리는 어떤 음성을 듣고 있나. 서로 배제하고 할퀴면서 그때 그 신의 은총을 무르고 있지는 않은가. 손을 맞잡은 두 아이, 토니와 셜리의 모습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지는 자명하다. 벌거벗었을 그때부터, 우리 모두는 같은 모습이 아닌 적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