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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Jan 01. 2021

창조과학의 세례에서 이성의 세례로

창조과학 믿으면 큰일을 못 합니다


창조과학 믿으면 큰일을 못한다. 2017년 중소벤처기업부장관으로 지명됐던 박성진 후보자가 한국창조과학회에서 이사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창조과학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과학계는 "인류의 집단 지성을 부정했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기도 했다. 결국 박성진 후보자는 자진 사퇴했다. 개신교 내에서는 희대의 발견으로 추앙받는 창조과학이, 교계 밖에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낱낱이 드러낸 사건이다.


어쩌면 나도 큰일을 못할 뻔(?) 했다. 내가 나온 기독교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모두 '창조과학의 세례'를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창조와 진화'라는 '창조과학'을 가르치는 수업이 있었고, 대부분이 '창조와 진화'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더라도 채플이나 다른 기회로 '창조과학 특강'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피하고 졸업했다는 사람을 많이 못 봤다. 나도 마찬가지. 문제(?)가 하나 있다면 '창조와 진화' 수업 성적이 'B0'로 참담했다는 것인데, 사실 지금 와서는 되려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다. 학문적 가치가 없는 수업에서 높은 성적을 받았다면 수치스러웠겠지.


대학교 1학년, 스무 살 순수할 때 창조과학 수업은, 마치 내가 전혀 모르던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과학(같아 보이는 것)을 통해 하나하나 끼워 맞춰지는 성경의 모호한 부분이 신의 존재까지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십 년 모태신앙의 내게는 그랬다.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확고한 믿음은 몇 년간 지속됐다.


군종병마냥 교회에 자주 다녔던 군생활 중에서도 창조과학은 불쑥불쑥 나를 찾아왔다. 당시 군목으로 계셨던 목사님은 병사들이 많이 출석하지 않는 저녁예배 시간을 '창조과학 특강'시간으로 꾸몄다. 자신이 직접 강의하기도 하고, 유명한 김 모 교수의 창조과학 DVD 시리즈를 둘러앉아 보기도 했다. 노아의 홍수, 셈 함 야벳의 인종, 한자 속 창조의 증거 등 창조와 진화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그대로 복습했다.


문제는 군 시절 내가 비판적인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 창조과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그때부터 슬금슬금 시작됐던 듯하다. 제일 터무니없어 보였던 건 '한자와 창세기'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강의였는데, '배 선' 자가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말이 안 돼 보였다. 이 작은 의심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그때의 내가 고마울 지경이다.


그때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제일 먼저 집어 든 게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IVP)였다. 그때는 진화적 창조론이니 유신 진화론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몰랐고, 진화론은 악마의 학문이라고 생각할 때였지만,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책에서 더없이 큰 은혜(?)를 받았다. 그 이후로 여러 책과 자료를 피하지 않고 접하면서 창조과학은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됐다. 창조과학의 세례를 받은 내가, 신이 허락한 이성으로 다시금 세례 받은 셈이다.

오래간만에 열심히 공부 중.
"하나님을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을 메워주는 미봉책으로 삼아선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지더군. 사실상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인식의 한계들이 계속 밀려나면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계속 밀려나고, 결국에는 끊임없이 퇴각하고 말 것이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야지, 인식할 수 없는 것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선 안 되네. 하나님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해결된 문제 속에서 우리에게 파악되기를 바라시네. 이것은 하나님과 과학적 인식의 관계에 유효한 말이지만, 죽음과 고난과 죄책에 관한 인간의 일반적인 물음에도 유효한 말이라고 할 수 있네."


언젠가 읽은 본회퍼의 <옥중서신> 한 대목이다. '주님의 뜻'이라는 말을 아전인수격으로 읊어 대는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 기록해 놨다. 좀체 파악할 수 없는 부분, 자기 입장에서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 만한 부분에서 신을 끌어다가 이름 붙이고 '감사하는 행태'가 우리게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을 '불완전한 인식'을 메우는 데 이용하는 순간, 신은 평생 우리의 입맛에 맞게 일할 것이다. 그런 신은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신은 본회퍼의 말처럼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람, 관계, 이야기들에서 파악되기를 원하고 있다. "네 옆의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성서 구절은 그런 의미일지도 모른다. 성서 말씀 또한 활자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적용되고 이해되는 현장에서라야 힘이 생긴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원하는 건 그의 이름을 남용하기 전에 서로의 문제를 직시하고 함께해 주는 일임이 분명하다.


창조과학을 보는 스무 살 내 눈이 반짝거렸던 이유는 '하나님을 변증하고 싶어서'였고, '성경이 진짜'라는 걸 순수하게 믿고 싶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과학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을 폄하하고 싶진 않다. 허나 우리가 믿는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는 과학으로 설명될 수도, 설명될 필요도 없는 존재여야 한다고 믿는다. 신앙의 길은 좁고 험난한 길이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에겐, 쉬운 확신보다 고된 믿음의 길로 내딛을 용기가 필요하다. 혹시 모르지 않나. 내가 큰일을 하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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