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수님이 싫다'(2018)
* 스포일러 주의
선생님, 기도했는데 이뤄지지 않았어요.
이사하면서 미션스쿨에 입학하게 된 유라는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조차 어색하다. 십자가를 진 예수의 그림을 할머니에게 가져다 "누구냐"고 묻는 것부터가 영락없는 비신앙인 어린이의 모습 아닌가. 자꾸 일어섰다가 앉히는 예배 형식도, 성경책도, 찬송가도, 남들 다 외우는 주기도문도 그에게는 주문같이 들릴 뿐이다.
친구들이 다 눈 감고 깍지를 끼니 자기도 해 본다. 소원 비스무리한 걸 비는 것 같으니 자신도 빌어 본다. 어라, "친구가 생기게 해 달라"는 기도가 금세 이뤄진다. 축구도,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카즈마가 그의 친구가 된다. 함께 유성우도 보고, 카즈마의 어머니와 함께 별장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소원을 이뤄주는 유라의 예수는 작다. 기도를 하려 손을 모으면 '뿅'하고 나타난다. 카즈마의 짧은 기도를 듣고는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 작은 예수가 들은 기도들은 곧잘 이뤄진다. "돈을 벌어다 달라"는 기도는 유라에게 1000엔을 가져다 주기까지 한다.
영화 중반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카즈마의 교통사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한 유라는 또다시 기도한다. '카즈마와 다시 축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순수한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중 가장 간절한 기도임에도 작은 예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카즈마는 세상을 떠난다.
유라는 카즈마의 고별 예배에서 조문과 기도를 맡게 된다. "더 커서 먼 훗날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조문을 읽고, 기도를 위해 손을 모으는 유라. 그제야 예수가 눈앞에 나타난다. 작은 예수 뒤로는 항상 웃던 카즈마의 어머니가 죽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유라는 그제야 눈치챘나 보다. 저 아픈 마음의 사람 앞에서 이 기도가 무슨 소용이랴. 유라는 모은 두 손으로 '쾅'하고 예수를 내려친다. 예수는 사라진다.
신은 대부분의 순간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침묵한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당신의 민족이 당했다는 홀로코스트의 아픔에도, 세월호의 침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우리의 기도도 사실상 응답되지 않았다. 신이 전능하다면 차디찬 바다에 빠져가는 세월호를 들어 올리면 될 일이었다. 아니,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말도 이제는 지겹지만 한국교회의 주류의 기도는 여전히 새벽녘 물을 떠 놓고 삼신할머니에게 바치던 기도와 전혀 다르지 않다. 세속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욕심을 투영한 '비나이다'일뿐. 가끔 보면 그들의 기도는 이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장로 대통령도, 전도사 대선 후보도 나타나는 걸 보면 신이 저들 기도만 들어주고 있나 싶어지기도 하니까.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는 힘이 없는 걸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나는 어차피 응답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잘 기도하지 않는다. 유라도 어쩌면 그 마음으로 예수를 내리쳤을 테다. '지금은 이 기도보다 저 어머니에게 위로가 필요해', '응답되지 않을 기도로 괜한 희망을 만들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
지금의 나는 응답은 오는 게 아니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존재가 응답일 수 있는 셈이다. 취재하며 마주한 세월호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아픔 옆에 머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응답인 것 같다"고 누누이 말했다. 상실의 아픔 속에 응답은, 내 것이 아닌 상실에도 함께 슬퍼하고, 가끔은 그 신이 의미 없다고 이야기해 주기도 하고, 그 장고의 침묵을 함께해 주는 것일 테다.
신은 응답하지 않는 대신 '응답인 이들을 보냈다'. 그는 지금도 사람들이 꾸며낸 자기 모습은 내려쳐버리고, 고통받는 이들의 기도 응답이 되어 주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