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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Jan 22. 2021

내일모레 서른, 사랑니 뽑다

사랑니의 인정투쟁


고작 이 하나인데 존재를 흔든다. 작년 이맘때 위쪽에 난 사랑니를 뺐다. 당시 의사선생님은 X-ray 사진을 보여주면서 아래 사랑니들이 숨어 있다고, 언제든 빼야 할 거라고 경고(?)했다. 매복사랑니의 무시무시함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나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그 고통을 미래의 나에게 맡긴 채..

발치하고 나면 제대로 못 먹을 것 같아 즐긴 최후의 만찬. 계속 생각나..

때가 왔는지, 사랑니가 어금니를 밀어내는 것 같은 아픔이 전해졌다. 이가 시리고 괜히 흔들거리는 느낌이었다. 사랑니라는 직감이 왔다. 한 해 전 사진으로 마주했던 그가 자기를 좀 봐 달라고 인정투쟁을 하는 것만 같았다. 욱신거리는 아픔은 딱 '기분 나쁜' 정도였다. 일도 손에 안 잡히고... 하여간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집 앞 치과에 전화를 했더니 '매복사랑니'는 상황을 보고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금 같은 연차를 쓰는데 이곳저곳 다닐 수는 없는 까닭에 정보 검색을 시작했다. 집 주변 반경 5km 내에서 '사랑니 전문 치과'를 몇 개 찾았다. '모두닥'이라는 사이트에 나온 병원 후기와 의사선생님 후기를 찬찬히 살폈다. 집에서 버스 타고 15분 거리에 칭찬 일색인 병원을 발견했다. 인터뷰 차 밖에 나와 있었던 터라, 취재를 마치자마자 전화를 걸어 다음날 오전으로 예약했다.


괜히 잠이 안 올 것 같았지만 푹 잤다. 개운하게 일어나 갈 준비를 하면서도 무섭진 않았다. 워낙 '잘한다'는 호평이 많이 보이기도 했고, 전문가를 믿지 않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원래 치과란 곳이 의자가 젖혀질 때부터 두려움이 시작되는 곳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깔끔한 병원에 들어서서 치아 사진을 찍었다. 작년에 본 녀석들이 그대로 아랫니 옆에 가지런히 누워있다. 이중 왼쪽 녀석을 들어 내기로 했다. 왜 내 입속에 누워 있어야만 했니.. 왜 그래야만 했니.. 원망하면서 그들이 내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해본다.

발치 후 지켜야 할 것들. 바이블(?)인 셈.

부정해봐도 결론은 하나다. 그놈을 깨부숴 들어내야 한다. 젖혀지는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두어 번 한다. 이내 들어온 선생님은 두려움에 떠는 어른들을 어르고 달래는 데 선수 같아 보였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오셨죠?"라며 짓는 미소는 괜한 안정감을 줬다. '당신이라면 내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겠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선생님은 이를 자르고, 부수고, 뽑아내는 끔찍한 과정을 일일이 설명했다. "잇몸 잘 찢었구요~ 이제 치아 갈게요~",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 날 거예요"와 같이, 문자로 보면 끔찍한 말인데 귀로 들으니 이렇게 스윗(?)할 수가 없다. 결국 나의 안위를 위한 과정이니 그렇게 여겨졌나 보다.



발치는 15분 만에 끝났다. 마취하고 기다린 시간까지 합해도 30분이 조금 넘었다. 선생님은 바스라진 치아를 보여줬다. 이게 머리고, 이게 뿌리 부분이고.. 또 하나 잘 마무리했다며 해맑게 웃는 그야말로 발치를 위해 태어난 이 같았다.


이는 갔지만 아픔이 남는다. 마취가 풀리고 몰려오는 고통은 '왜 나를 떠나보냈냐'는 사랑니의 마지막 몸부림인지 쉽게 가시질 않는다. 꾸역꾸역 죽을 밀어 넣다가 입을 잘못 벌리자 또다시 찌릿한다. 그 인정투쟁은 여전히 계속된다. 이 아픔이 며칠은 간다니까, 그동안은 내 안에 꽤 오래 머무른 그를 생각해야겠다. 이별은 생각보다 아프다는 걸 고작 이 하나가 알려준다. 고작 이 하나인데 존재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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