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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Feb 15. 2021

내 글은 언제쯤 삶이 될 수 있을까

오래 전 써내렸던 글

요즘은 교회에 퍽 열심히(?) 다니고 있어요. 얼마 전 설교에서 한 목사님이 '인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구약성서 속 왕 사울은 인간의 인정을 바랐지만, 다윗은 신의 인정을 바랐다는.. 사실 너무 당위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라 딱히 와 닿진 않았어요.(머쓱;;)


설교를 듣고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인정이라는 걸 '존재에 대한 인정'과 '행위/결과에 대한 인정'으로 나눠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A 학점 받은 학생을 'A 학점 학생', 금메달 딴 사람을 '금메달 사람'으로 인정하는, 그런 게 행위 혹은 결과에 대한 인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뭐 평가야 가능하겠지만 그게 결과나 행위 자체를 넘어서서 '존재에 대한 인정'에까지 침범해 버리는 순간, 그러니까 금메달 딴 사람의 존재까지 '금메달'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순간, 사람을 급으로 나누게 되고, '모습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거 아닐까 싶어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게 어려운 거 누구나 알잖아요. 우리가 믿는 신은 그걸 하고 있다고 배우긴 했는데 느끼기가 참 어려운 거 같아요. 그렇다면 그 '신의 인정'을 마냥 바라고 머무르기보다는, 신의 형상이라는 인간이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러다 보니 백예린의 '지켜 줄게'라는 노래가 떠올랐어요. "자주 보러 오겠다, 시키지 않아도 지켜 주겠다"는 메시지가, 우리가 여기 있다고, 아등바등 존재만이라도 인정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존재를 인정하는' 따스함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예기치 않은 기회로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읽었는데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도 번역되는 책 맞습니다) 주인공 베르터의 편지 글은 왠지 모르게 달라 보였어요. 사랑하는 친구에게 꾹꾹 눌러썼을 글은, 생생한 활자活字였달까요. 사실 그는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데, 사랑과 고통, 고뇌를 눌러 담아 보낸 편지는 독자가 그가 선택한 죽음까지 납득하게 만들어요.


무튼 이 책을 읽는 와중에도 '인정'에 관해 생각하게 됐어요. 사랑을 잃어 목숨까지 끊는 일이 그리 자주 일어날까마는, 얕게 생각해 보면 '사랑받지 못해서' 제 존재까지 부정해 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고, '사랑이 닿지 못해서' 슬퍼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겠어요.


베르터의 인생은 결국 사랑(인정) 받기 위한 투쟁이었던 거죠. 그 인정 투쟁에서 원하던 사랑을 얻지 못한 그는, 목숨을 끊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요. 이 비극이 시공을 뛰어넘어 사랑받는 건 오히려 슬픈 일인 듯하네요.


저는 한번의 따스함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단번의 따스함이 없어서 자기를 잃어 가는 사람이 너무 많은 세상이지만요. 좋은 세상은 못 만들어도 아픈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 쉽지 발이 떨어지지 않네요. 방구석에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으면서.. 오늘도 글이 삶을 무참히 넘어서 버리는데, 제 글은 언제쯤 삶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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