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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Mar 08. 2021

"하면 된다"가 싫다니까요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서

5년 전 올림픽인가, "할 수 있다"는 한 펜싱 선수의 되뇜이 화제가 된 적 있다. 우연히 카메라에 잡힌 그 말 때문에 그 선수는 광고도 수없이 찍었더라.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승리를 이뤄낸 값진 장면이었기에 많은 이가 공감했겠지.


이렇게 아름다운 스토리만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로 점철된 '노-력 사회' 아니던가. 어떤 상황에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를 주문처럼 외는 사람들 앞에서, 기회마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소거될 뿐이다. 오죽하면 복음성가에서도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 나의 능력 주 하나님'이라고 할까. 종교가 이래서 되는 겁니까.


우리나라엔 고려시대 때부터 과거시험이 있었다지. 그때부터 이놈의 능력주의가 발아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그것보다 훨씬 오래일지도 모르고. 그래서인지 이놈의 나라에서 공정이니 정의는 더 뜨거운 감자가 된다. 책 속 미국의 모습도 보고 있자면 착잡한 건 매한가지지만, 이 나라의 능력주의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가늠조차 안 된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던 정부가, 오히려 이 이슈로 공격받고 있다는 점 또한 한국인들의 유별난 '노-력 사랑'을 보여주는 듯하다. 촛불 혁명의 시작도 어찌 보면 공정의 탈을 쓴 능력주의였는지 모르고, 인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조국 사태 등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일들 중간중간에는 능력주의가 도사려 왔다.


이렇게나 많은 이슈가 이념과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두되고 있는데, 정치인들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공정성에 예민하다. 이 나라가 공정하지 않다!"는 간단한 명제로 눙치고 넘어가고 있다. 능력주의라는 거대 담론은 외면한 채.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하는가!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참 당연한데, '하면 된다'를 뒤집으면 '네가 제대로 안 해서 그래'가 된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깨닫기가 쉽지 않다. 내가 잘되는 것도, 저 사람이 잘되는 것도 100%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우리는 왜 '하면 된다'를 입에 붙이고 사는 걸까.


'운이 좋았다'가 괜한 겸손이 아닐 수 있다면, 자기가 누려 온 특권들을 돌아보는 한마디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1월, 9급 공무원 한 명이 '업무 물어볼 곳 없어 힘들다'며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무엇이 말단 공무원이었던 그에게 그렇게 큰 짐이 됐을까. 우리 사회가 '하면 된다'는 집단 환각에 빠져 소중한 생명들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날로 착잡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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