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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Mar 12. 2021

속도가 다른 것뿐인데

춘천 가는 기차에서

춘천 가는 기차 안. 오래간만에 탄 기차지만 설렘은 없다. 일하러 가는데 무슨. 예매할 때만 해도 옆자리 앉을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자릴 부러 고른 건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은 아니고, 옆에 사람이 있으면 괜히 신경도 쓰이고, 그래서다.


청량리에서 2층석이 있는 ITX-청춘에 올랐다. 다음 역인 옥수에서 곧바로 할머니 두 분이 올라탔다. 앞서 오시는 할머니는 타면서부터 "4호차, 12B, 4호차, 12B"를 중얼거리며 계단을 올라오셨다. 그건 바로 내 옆자리. 그건 둘째치고 문제는, 탄 사람은 둘인데 할머니가 알고 있던 자리는 하나였다는 사실. 다행히 내 자릴 뺏진 않으시고 앞뒤로 두 분이 앉으셨다.


이후 다른 자리를 알아내기 위한 분투(?)가 벌어졌다. 조카가 대신 끊어 준 기차표였는지, 다른 사람이 써 준 듯한 '승차권 조회법'이 적힌 노란 종이를 꺼내 들고는, 어플에서 로그인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자기, 여기에 휴대폰 번호 좀 입력해 봐." "비밀번호 12345 맞어?"


두 분은 한참 실랑이를 벌이시다가 결국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받은 조카 분도 바쁘셨는지 퍽 무심했다. 써준 대로 하면 되는데 왜 또 전화했냐. 뭐 잘못 누른 거 아니냐.. 결국 할머니는 조카에게 승차권 캡처본을 받았다. 그렇지만 캡처본을 역무원에게 내밀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불똥이 내게 튀겠거니 싶어 기다리고 있었다. '알쏭달쏭 스마트 세상이 버거운 노인 옆 자리에 e-book reader를 들고 앉은 젊은이.' 이거 너무 좋은 그림이잖아. 클리셰다 싶을 정도로 도움을 요구할 만하게 생겨먹은 모양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도와드릴까요?" 기다렸다는 듯 오래된 스마트폰을 내미시는 할머니. "이게 하라는 대로 해도 안 되네요."


나름 얼리어답터(?)인 나도 어쩐 일인지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비밀번호가 '12345'라는데, '틀린 비밀번호'라는 안내 창이 나를 위협하기만 일쑤. 5번 틀리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고 협박하니 지레 겁이나 "죄송하다"며 휴대폰을 돌려드리고 말았다.


이내 역무원이 찾아왔다. 승차권 조회 못 하느냐고 몇 번 묻더니 조카와 전화를 연결해 달라며 할머니 전화기를 받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깐의 통화 후 조치를 취한 듯했다. 알고 보니 두 분 자리는 4호차가 아니라 5호차였고, 12B가 아닌 6A, 6B였다. "우리 여기 맞대?" "아니래. 옆 열차라네. 그 선생님이 여기 있어도 된대."

인터뷰 진행한 카페에서 마신 음료. 예뻐서 찍어 놨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이번에는 돌아오는 열차 좌석을 알아봐야 했던 것. "이제는 오는 차가 문제네" 하며 한숨만 푹 내쉬시기에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제가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해결하고 말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제야 문제가 눈에 보인다. '미등록 고객'으로 로그인해야 했는데, '등록 고객 로그인'에서 전화번호를 주야장천 입력해 왔던 것. 나도 두 번 살피고 나서야 발견했는데, '로그인' 의미도 잘 모르시는 할머니가 쉽게 해결하셨을리 만무하다.


그렇게 오는 차표를 조회했다. 가는 차와 동일하게 5호차 6A, 6B였다. 조카 분도 헷갈리지 말라고 일부러 왕복하는 동안 같은 자리로 예매했나 보다. 괜한 걱정에 "어디 적어 두셔야 하지 않겠어요?" 하고 말을 건넸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라고 말하시는 데 나도 모르게 무시한 것 같아 죄송했다.


"5호차 6A, 6B." 내리기 전까지 수 번을 되뇌시던 두 할머니는, 내가 화장실에 다녀온 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분명 일어난 일인데, 괜히 영화 속 한 장면에 있다 떨어져 나온 기분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옆엔 아무도 앉지 않아 꾸벅꾸벅 졸며 왔다. 갑작스런 큰소리에 깨 보니 내가 탄 열차 옆으로 일반 전철이 유유히 뒤처진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다른 속도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데 서툰가,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언젠가 따라오겠지' 하다가 멀리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텐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무언가 묻는 어르신들 말은 좀처럼 단번에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변해가는 세상 속도를 못 따라가는 조급함이 묻어나 그런 걸까. 괜히 ITX 2층석 골라 탔다가 생각만 많아졌다. 할머니들, 돌아오는 열차는 잘 타셨으려나. '5호차 6A, 6B' 잊으셨음 큰일인데… 괜한 걱정이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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