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들 Aug 17. 2021

'고졸·비전공 디자이너'의 기쁨과 슬픔

이도후·김헵시바 디자이너 인터뷰 ①

대학이나 전공이 더 이상 다가 아닌 세상이라고 말은 하지만,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전공을 안 했는데 잘할 수 있을까', '대학은 안 나왔는데 괜찮을까' 등의 고민(혹은 걱정)을 하기 마련이다. 정작 실무에 가면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전공을 한 사람들이나, 대학을 가지 않고도 실무에 빨리 뛰어들어 자신의 길을 헤쳐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디자이너 지망생들을 위해 '고졸디자이너' 두 사람을 만나봤다. (고졸이니 당연히 '비전공자'다) 홈서비스 플랫폼 '생활연구소'에서 BX 디자이너로 일하는 이도후 디자이너와,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에서 일했고 계원예술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헵시바 디자이너를 8월 9일 만났다. 대학을 가지 않은 이유부터, 고졸 취업 성공기, 비전공자의 기쁨과 슬픔(?)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는 두 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 안녕하세요. 디자이너만 두 분 뵙는 건 또 처음인 것 같아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이도후 / '청소연구소'를 서비스하는 생활연구소라는 스타트업에서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는 이도후입니다. 웹 디자이너로 시작해서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를 거치고, 지금은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요. 일한 지는 4년 정도 됐네요. 다양하게 시도해 보고 배우면서 스펙트럼을 넓히는 중입니다.

김헵시바 / 저는 김헵시바입니다. 도후님과 같이 이화미디어고등학교 미디어디자인과를 나왔고, 졸업 후에 동구밭이라는 소셜 벤처에서 6개월 정도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그다음에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에 들어가서 3년 정도 일했고요. 지금은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 대학이 디폴트인 사회잖아요. 왜 당시엔 대학에 안 가기로 결심했는지부터 들려주세요.

헵시바 / 원래는 미대에 갈 생각이었는데요. 입시 미술을 할 때는 전혀 재미없고 잘하지도 않는다고 느꼈는데, 디자인 과목 들을 때는 잘한다는 느낌도 있고 재밌었어요. '어차피 디자이너 되려는 건데 입시를 계속해야 하나?' 싶었어요. 우선 취업을 하고 대학교 가고 싶으면 그때 가자고 마음 먹었죠.

당시에 학교에서 '디자인 취업반'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보통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취업한다고 하면, 컴활이나 워드 자격증을 따게 한 다음에, 학교에서 연계한 '고졸 취업 전형'으로 가는 게 일반적이거든요. 일반적인 취업 형태는 아니었죠. 학교에서도 취업률을 늘려야 하니까, 디자인 취업반을 만든 건데 거기 들어갔죠.

도후 / 당시에, 냉정하게 성적을 봤을 때 '좋은 대학을 갈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고요. 정확히는 열심히 안 하고 놀면서 했는데, 문득 '대학의 존재 의의'가 뭔지 질문하고 그랬어요. 하기 싫은 건 못 참는 성격이기도 했고요. 과거 제게 대학은 '취업이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수단'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심화적인 걸 배우기보다는, 그냥 졸업증 따는 목적 같았거든요. 그래서 도피성으로 디자인 취업반을 선택했죠. '고졸이어도 디자인 잘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자'라는 패기도 있었고요.(웃음)

- 막연한 질문일 수 있지만, 취업 준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두 분의 '고졸 취뽀' 과정이 궁금해요.


헵시바 / '취업'에 대한 감각이 없긴 했죠. 취업반도 그렇게 재밌진 않았어요. 저는 대신 학교 밖에서 활동을 많이 했어요. 디자이너는 어디에나 필요하거든요. 역할은 다를 수 있지만 '포토샵 기술자'가 필요한 곳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당시 플리마켓이나 굿즈, 텀블벅이 흥하던 시기라, 굿즈 같은 걸 자잘하게 만들어 팔아 보기도 했고요. 그러다보니 학교 밖에서 일을 더 많이 경험했어요. 하고 싶은 거 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포트폴리오가 쌓였고요. 자소서나 이력서, 스피치는 학교에서 특강이나 취업반 교육이 잘 돼 있어서 그런 걸 들으면서 익혔어요. 

도후 / 취업반에 월말 평가 시스템이 있었거든요. 작업을 하고 그걸 정제해서 취업반 학생들에게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런 게 있다보니까 포트폴리오 얼개를 짤 수 있는 수준의 제작물이 나왔어요. 원래 뭘 모르는 사람일수록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잖아요. 취업 사이트에서 채용 공고 읽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이면 무작정 넣었어요. 취업 사이트에 있는 양식으로 학교 내에서 했던 활동이나 굿즈 판매했던 경험들 기반으로 자기소개서를 썼고요.

처음 간 회사는 일요일에 넣고 30분 만에 연락왔는데. (나: 일요일에 연락 주는 회사라니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면접 보고 들어가서 한 달 반만에 나왔어요. 다들 그렇듯이 아무 기준도 없이 첫 회사를 간 거죠. 그래서 폭망했고..(웃음) 두 번째는 데인 게 있으니까 나름 기준이 생겼죠. '알려진 회사를 가야겠다. 그럼 어느 정도 기본은 하겠지.' 사실 그것도 구체적으로 본 게 아니라, 네임밸류만 기준으로 했는데... 

패션 회사였는데 업계 특성상 야근이 많았죠. 몸을 혹사시킬 정도로 업무가 많아서, 2년 일하고 나왔어요. 그래도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려다 보니까 작업 데이터가 많이 쌓여있더라고요. 그때부턴 확실히 달라졌죠. 어떤 게 잘한 작업이고, 내가 어떤 게 자신 있고, 앞으로 갈 회사는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는데 내가 어디에 기여할 수 있는지 등등. 전보다 명확한 기준이 생기더라고요.

헵시바 / 제 첫 회사는 디자이너랑 일할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것 같아요. OEM이나 B2B에서는 좋은 퍼포먼스를 내는 회사였는데, B2C에는 조금 약하다 보니 마케터랑 디자이너 뽑으면서 시도해보려고 했던 거거든요. 저도 어디 소속돼서 일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거칠게 배웠던 기억이 많이 들어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품으면서요. 그때는 디자인을 하기 좋은 조직 문화라는 게 어떤 건지 아예 몰랐죠. 부딪히면서 일했던 거 같아요. 힘들기는 했지만 많은 걸 배웠어요.


고등학교 동창인 이도후, 김헵시바 디자이너.(왼쪽부터) 옛날 이야기를 할 때면 괜히 신나 보였다.

- 고등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경험을 쌓는 데 한계가 되기도 하죠? 미성년자니까 인턴이나 디자인 외주 작업을 하기가 쉽지도 않고요. 어떤 부분을 신경써야 할까요?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도 궁금해요.

헵시바 / 고등학교에서 외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대학생은 신분상 인턴이나 대외활동에 접근하기 쉽잖아요. 고등학생은 방학 때 인턴하려면 보호자 동의도 필요하고, 외주 작업을 하면 미성년자라 근로계약서 쓰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그 과정에서 부당한 일이 많이 생기고, 페이도 후려치기 당하고…. 고등학생 신분을 이용해서 싸게 부려먹으려는 사람들도 있죠. 얻을 게 있으면 그렇게 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동력만 잔뜩 제공하고 끝나는 경우도 주변에서 많이 봤어요.

도후 / 고등학교 다닐 때, 여러 유행이 돌고 돌았지만 일명 '마이보틀'의 전성기나 다름없었는데요. 얼굴 사진 받아서 커스텀으로 만들면 선물용으로도 니즈가 있지 않을까 싶어 실제로 실험해 봤는데, 생각보다 이윤이 잘 남는 거예요. 작업 시간까지 고려해도 충분히 남는 장사여서, 텀블러 팔아서 몇백 벌었죠. 굉장히 짭짤했어요. 떡볶이 맨날 사먹고.(웃음)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도후 디자이너가 고등학생 시절 만들어, 몇백을 벌었다는 그 텀블러. 사진을 보니 그때의 감성이 ㄱl억Lr…

- '대졸 신입'이 디폴트인 회사들도 많잖아요. 고졸이라고 하면, 당장 연봉부터 적게 받을 수밖에 없고요.

도후 / 당시 고졸이라는 이유로 첫 연봉을 엄청 불리하게 받았어요. 2년 다녔던 회사 팀장님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하는 걸 아시고, 대졸 신입을 기준으로 놓고 연봉을 정했던 거죠. 사회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겠지만 실력과 경험은 배제하고 일단 고졸이라는 위치만으로 정한 거니까 억울했어요.

문제는 이게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건데요. 포트폴리오와 무관하게, '전 직장 연봉이 이 정도니까 여기선 이 정도 받아'라고 통보받게 돼요. 처음에 굉장히 낮게 잡았던 게 후회됐죠. 만약 고졸·비전공자 신입으로 취업하는 분들은 아무리 내가 조급하고 자신 없다고 하더라도 터무니 없이 낮게 부르는 곳은 웬만해선 안 가시면 좋겠어요.

- 비전공자나 고졸이라고 항상 차별받는 건 아닐 테지만, 보이든 보이지 않든 차별이 있잖아요. 대졸이나 전공자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기 확신이 부족해지는 순간이 생길 수도 있고요. 고졸·비전공자라서 겪은 어려움은 없었나요.

헵시바 / 좋은 문화를 가진 회사들을 다녀서 큰 차별을 경험하진 않았지만, 나름의 컴플렉스가 있었던 거 같긴 해요. 저같이 스타트업 문화를 빨리 경험한 사람들은 문제 해결이나 팀워크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는 있겠지만, 반대로 조형적으로 새로운 걸 만들어내고 틀을 깨는 작업에는 쉽게 도달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죠.

고졸이어도 그런 작업은 당연히 가능하겠지만, 대학교 교육에서는 시각적인 훈련과 도전을 많이 경험해 볼 수 있으니까 다를 수 있잖아요. 빠른 리듬의 디자인 노동 안에서는 완성도에 집중한다든지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회사에선 상세 페이지나 배너만 주구장창 만들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전보다 성장했다는 걸 느끼지만, 내가 가보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생각을 계속했던 거 같아요. '대학을 안 가서 그런가?' 하는 의구심도 들고요. 

도후 / 저는 취업과 동시에 사이버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긴 했는데, 사실 여기서도 열심히 안 했어요.(웃음) 가장 큰 목적이 졸업장을 따서 연봉 테이블 (대졸 사원과) 동일한 선상으로 맞추기 위해서였거든요. '대학에서 여유있게 시간을 가지면서 배울 수 있는 이론이나 실습을 미처 해보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긴 하죠. 틀을 깨는 작업도 마찬가지고요.

'만약 대학교를 가서 실습하고 배웠다면 지금과 다른 디자인 하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저도 들어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의구심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지금 온 길을 절대 후회하진 않아요.

헵시바 / 저는 그 의구심이 깨졌던 경험이 있어요. 온라인 퀴어퍼레이드(온라인 퀴퍼)를 작업하면서인데요. '온라인 퀴퍼를 진행한 일'까지는 내가 걸어온 길 안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후에 '코리아디자인어워드'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상을 탔거든요. 전 좀 놀랐어요. 사실 디자인계가 뭔지도 잘 몰랐지만, '디자인계는 시각적으로 새로운 작품에 주목할 거고, 내 프로젝트는 마케터들이 좋아할 거다'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근데 상을 받았다는 건 그 판에서 주목을 해줬다는 방증이잖아요.

디자이너가 도전할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는 거고… '나 같은 커리어를 가진 디자이너도 인정받을 수 있구나'라는 희망을 얻었던 것 같아요. 이 사례를 보면 힘을 얻을 수 있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완성도나 시각적인 새로움으로 상을 탔다기보다는, 참여를 이끌어낸 기획과 거기서 이뤄낸 사회적 임팩트에 주목해 줬던 것 같아요. 그 모든 게 맞아떨어진 디자인으로 봐준 거겠죠. 그런 것들은 대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괜찮은 거 같아요.


김헵시바 디자이너가 캠페인 리드와 디자인으로 참여한 '온라인 퀴어퍼레이드'. 7만 명 이상이 참여하며 화제가 됐다.


도후 / 요즘에는 하나의 이미지보다 디자인을 통해서 얻는 총체적 경험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니까요.

헵시바 / 그래도 시각적으로 너무 잘하는 사람들 보면 부글부글 끓긴 하는데.(웃음) 멋있잖아요. 사실 그건 대학교 가든 안 가든 상관 없죠.

도후 / 모든 디자이너에겐 그런 열망이 있을 거예요.

- 대학에 안 갔다고 항상 차별받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좋은 점도 있었을 것 같아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두 분이 느끼기에 전공을 안 한 상태로 일을 시작하면 좋은 점은 뭐였나요.

헵시바 / 유연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던 게 제일 커요. 제 창작자로서의 에고(Ego·자아)가 너무 강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노동 자체에서 오는 빠른 리듬이라든지, 협업 감각이라든지… 내가 날 먹여살리는 기쁨을 잘 느낄 수 있는 거죠.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틀에 갇히지 않는 좋은 노동자로 잘 클 수 있었고요.

무엇보다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돼요. 좋은 학교 나왔다고 좋은 동료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대학에서 오는 기회들이 중요한 거지, 대학 자체는 큰 의미가 없는 거니까요. 

도후 / 스스로의 노동으로 얻은 뿌듯함은 물론이고, 돈을 번다는 행위 자체만으로 자아가 한층 탄탄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실무를 조금 더 일찍 하면서 노련해지는 게 어드밴티지인 것 같고요. 

사람을 학력 차별 없이 보는 것도 큰 포인트예요. 이 부분은 대학보다는 사람 자체의 성향에 달린 문제에 가깝지만, 제가 겪은 환경이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배울 수 있고, 또 어떻게 보완해야 나아질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헵시바 / 저는 디자인이 노동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작품으로 잘하는 분들도 많이 있지만, 틀 밖에서 디자인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만으로도 배울 수 있는 지점이 많을 거예요. 나한테 부족한 게 뭔지 항상 생각하고 가능성을 닫아 놓지 않는다면, 성장도 더 빨리할 수 있고 재밌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요. (2편에서 계속)


이 인터뷰는 <컴퍼니 타임스>에도 게재된 콘텐츠입니다.


김헵시바 디자이너 ▶︎ Instagram. @hepzzzzi / @hepzi.works(작업 계정)

이도후 디자이너 ▶︎ Behance(작업 계정)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친절한 갓생 도우미, '투두메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