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이름일 뿐
가끔 어떤 이름이 그 사람에게 아주 어울린다거나, 외모와 성격이 이름의 어감을 따라가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사람을 넘어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guy’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사람을 지칭할 뿐 아니라, 때로는 저항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 ‘Tom, Dick, and Harry’(아무나, 누구나를 의미)에서처럼 너무나 평범한 Tom이라는 이름이 때로 굴종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Guy - 반역자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영국의 종교 갈등 속에서 한 가톨릭 신자가 국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합니다. 이름은 가이 포크스(Guy Fawkes). 국회를 폭파하려던 이 사건은 'Gunpowder Plot(화약 음모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그가 붙잡히고 난 뒤, 영국 사람들은 매년 11월 5일을 '가이 포크스의 날(Guy Fawkes Night)'로 부르고 허수아비처럼 생긴 인형을 만들어 태웠습니다.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모양의 이 인형을 'guy'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 단어는 '괴상한 남자'라는 뜻을 갖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그 괴상한 남자의 얼굴은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 됩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에서는 주인공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웁니다. 또 인터넷 행동주의 단체 어나니머스(Anonymous) 그리고 거리의 시위자들이 이 가면을 사용하기도 하구요.
반역에 실패한 Guy라는 인물이 희화화되었다가 보통의 남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의 상징이 되는 다층적 진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Tom - 착한 이름의 추락>
'톰(Tom)'은 안타까운 길을 걷습니다. 'Uncle Tom'은 해리엇 비처 스토우의 소설 [엉클 톰스 캐빈]의 주인공입니다. 노예였지만 신앙심이 깊고 타인을 위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억압 속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폭력 앞에서도 복수를 택하지 않습니다. 그의 침묵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신념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인물에 대한 해석은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각색된 연극과 인권 운동의 담론 속에서 사람들은 톰을 '백인 주인에게 굽신대는 비굴한 흑인'으로 인식하게 되고, ‘Uncle Tom’은 기득권에 굴복하며 동족의 권리를 저버린 인물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비굴함과 자기부정의 상징어로 변질된 것이죠.
가이는 법을 어긴 범죄자였지만, 현대 사회의 불만과 분노를 투영할 수 있는 상징이 되었고, 그 가면은 정의로운 시민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톰은 현실에 순응하며 도덕적으로 올곧은 선택을 했지만, 역사적 맥락 속에서는 비겁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며 이름에 부정적 의미마저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름 역시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특정한 이미지나 의미로 남게 될지 모릅니다.
<평가의 무게를 내려놓고 진정 추구해야 할 것>
가이 포크스와 엉클 톰, 두 이름의 상반된 운명을 보고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영웅으로, 무엇을 비겁함으로 규정하는가? 시대는 어떤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어떤 행동을 폄하하는가?
저는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진부한 교훈을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는지는 나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할지도 모르니까요. 가이도 톰도 각자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고, 어떤 시대에는 영웅으로 또 다른 시대에는 비웃음거리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미래에 내 이름이 어떤 의미로 기억될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선택한 길을 진심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단지 삶을 낭비하지 않고 진실되게 살아내려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도 조금은 좋은 쪽으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집착은 버리기 어렵겠지요.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때론 지나치게 큰 부담을 느끼기도 합니다. 도덕률에 휩싸이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소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하는 일이 어떻게 평가받을까에 너무 많은 걱정을 쏟기보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신념을 더 강하게 길러야겠습니다. 그저 내가 가는 길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 평가보다는 신념에 충실하며 또 순간 순간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것에 집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