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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김영하의 '작별인사'를 읽고.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 없는 물음

by 성박사

창작물은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가사를 쓰고 싶어지는 법은 노래를 듣는 것이요,

글을 쓰고 싶어지는 법은 글을 읽는 것이다.

하나의 책을 읽으면 백 가지의 생각이 생긴다.

그 백 가지의 생각이 모두 맞든 틀리든 상관 없다.

그게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


정답이 없는 질문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다.


나를 똑같이 본떠 일종의 복제 인간을 탄생시킨다면(혹은 제작한다면),

나와 그(혹은 그것) 간에 한 치의 차이도 없다면,

둘 중에 어떤 것이 진정한 나인가?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는 주인공 '최철'이 겪는 위기와 그의 해소, 그리고 그의 일대기를 다룬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나'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요소들을 심어둔다. 주인공은 '나', 즉 개인을 개인으로 칭할 수 있는 지표를 '인생을 이야기화할 수 있느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탄생하면서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고 또 소멸되면서 그 이야기가 끝이 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한 개인이며, 그 이야기가 인생인 것.


a라는 시점에 태어나서 살아온 A, 그리고 그 A를 b라는 시점에서 복제해서 그대로 재현해낸 B.

A의 이야기는 a라는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B는 A를 완벽하게 복제해냈으므로 a(A의 탄생)부터 b(B의 복제) 시점까지의 기억를 가지고 있으나, 실질적인 B의 이야기는 복제된 t라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다만, B는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이야기 시작점을 a부터라고 인지할 것이다.


어찌 되었건 b 시점 이후에 A와 B는 서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같은 경험을 하는 삶을 살더라도, 둘의 물리적 위치가 다르고 이로 인해 정확히 똑같이 보고, 듣고,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b 시점 이후에는 A와 B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된다.

당연하게도 복제된 나는 나를 대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의 세포를 한 알 한 알, 새로운 세포로 교체하여보자.

a세포를 a'세포로, b세포를 b'세포로, ... 그렇게 모든 세포를 교체하였을 때,

모든 세포가 바뀐 나를 '나'로 정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우리 몸은 약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고,

1년 정도면 몸의 대부분 세포가 새 세포로 교체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한 개체로 인지한다.

이와 관련해서 유명한 난제로는 '테세우스의 배'가 있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플루타르코스-

배의 판자를 하나 갈아 끼울 때, 그리고 두 개, 세 개를 갈아 끼울 때, 그 배의 정체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귀납적으로 생각하면 배의 정체성, 즉 테세우스의 배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배의 판자를 하나만 빼고 전부 갈아 끼운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전과 같은 배라고 칭해도 될 지에 대한 의문부호가 붙는다.

이와 같이 관점의 차이가 인식을 바꾼다. 게다가 만약 배의 정체성이 달라진다면, 판자를 몇 개 갈아 끼웠을 때부터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테세우스의 배의 판자를 낡아서 교체하는 것이 아닌,

새 것인데도 그냥 교체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교체한 판자를 모아서 새로이 배를 건조한다고 생각해보자.

판자가 모두 교체된 테세우스의 배,

그리고 원래 테세우스의 배를 구성하고 있던 판자들로 새로 건조한 배,

둘 중에 어떤 배를 진짜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인간의 세포로 다시 돌아오자면,

모든 세포는 교체되지만 뇌세포는 교체되지 않는다고 한다.

즉 '나'를 정의하는 것은 뇌, 보다 정확하게는 뇌로부터 기인한 생각 등의 정신 작용일 것이다.


책은 약 100여년 후인 서기 210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해당 시대에는 인간을 거의 완벽하게 묘사한 '휴머노이드'까지 개발되기에 이른다.

소설 중간에 한 휴머노이드의 육신이 훼손되고 머리만이 남게 되는데,

이 머리를 기점으로 해서 일종의 부활시키기 위한 시도가 진행된다.


이론 상으로는 육신이 사망한 뒤에 뇌만 잘 보존한다면,

이를 새로운 심장, 혈관과 연결하여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큰 충격을 받으며 기억이 손상된다면,

내가 나라는 인식을 하지 못 하게 된다면,

혹은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다른 정체성들과 혼합되게 된다면,

그럼에도 그 뇌가 유지된다는 이유로 나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이 날 때 비로소 한 인생이 닫힌다고 한다.


그리고 인생을 구성하는 것은 어쩌면 '나'만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과 유기체들, 이 사회와 자연,

모든 것들 속에서 나는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


인류가 종말한 뒤에 나 홀로 덩그러니 살아 있다면?

우주 한복판에서 덩그러니 나만 떠다닌다면?

내가 나로서 살지 못 한다면 인생을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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