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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히 Oct 20. 2023

리뷰 / 나를 채우는 공백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추천하며


‘그림책을 읽어본지가 언제지?’ 책을 읽기 전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림책은 곧 아이들이 읽는 책이라는 인식이 내재되어 있어서 그런지 성인이 돼서 돈을 주고 그림책을 구입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계기로 그림책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었다. 흐릿하지만 그림책이 주는 따뜻함과 다정함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 분의 작가가 전 세계의 그림책을 소개한다. 시인이자 그림책 작가, 번역가, 기자, 출판평론가, 문학평론가인 작가들은 그림책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1. 나에겐 소중한 기억이 있어, 2. 내 곁에 다정함이 살고 있어요, 3. 나를 믿고 뭐든 해봐요, 4. 다정함을 만나러 가요, 5. 너에게 다정하고 싶어 라는 총 5파트로 목차를 나눠 다양한 그림책 속 이야기를 전한다.



나중에 한번 사서 읽어보고 싶은, 그림과 함께 차분히 느껴보고 싶은 이야기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사라진 기억을 불러오는 「너였구나」에서는 잊고 살았던 기억들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처음 보는 공룡이 주인공을 난데없이 찾아오고 주인공의 집에서 잠을 자고, 당연한 듯 함께 떠들고 웃는다. 공룡은 학창시절 주인공의 친구였다. 주인공은 잊은 줄만 알았던 과거의 추억과 기억들이 떠오르게 된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과거의 기억들은 잊고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어떤 발화점에 의해 고이 간직했던 추억들이 다시금 떠오르게 된다. 그 추억들을 「너였구나」가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친구와 웃고 떠들며 놀았던 기억,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어릴 적 친구들, 걱정 없이 잠들고 내일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아련하고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그림책은 앨리스 워커의 「다정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였다. 여러 국가의 사람들의 삶을 다채롭게 그려냈다. 자전거 타는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 놀이에 열중해 있는 필리핀 어린이들 등이 그려져 있다. 독자들은 이 그림책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비슷한 듯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따뜻하게 표현된 그림들을 보며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가만히 보면, 이 세상 거의 모든 집마다 우리와 미소를 나눌 수 있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한 명씩은 꼭 있어.” 라는 문구가 그림책에 적혀져 있는데, 가장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문구였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은 거두고 따뜻함의 존재를 믿는다면, 반드시 세상은 따뜻함과 다정함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앨리스 워커 작가는 타인의 ‘시무룩’을 민감하게 알아보고, 손을 잡아주며 방치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서로를 위하고 연대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이 세상이 올바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요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 몫을 챙기기도 바빠서 타인에 대한 관심은 꺼둔지 오래다. 조금 더 주위를 둘러보며 모두가 함께 잘 지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책은 문도연 작가의 「걸어요」 이다. 책 속에서 주인공은 그저 걷는다. 어디로 걷는지, 어떤 마음으로 걷는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정보는 주지 않고 묵묵히 걷는다. 별다른 설명과 이야기 없이 그저 걷는 모습을 담은 그림책이다. 이에 독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도 하고, 주인공이 어떤 상황일까 추측도 해보기도 한다. 많은 것들을 담아볼 수 있는 이 그림책에 매료된다. 


그러다가 길 위에서 강아지를 만나게 된다. 함께 걸음을 맞추고, 힘을 북돋으며 함께 걷는다. 그러다가 갈림길에서 헤어지게 되는데, 이들은 갈림길 앞에서 잠깐 멈춰 서로를 꼭 껴안는다. 그리고 서로의 길을 떠난다. 갈림길에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한 정보는 주지 않는다.


길이 마치 우리의 인생 같았다. 각자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같은 방향으로 서로 부축하고 발을 맞춰 나아가고, 갈림길에서 서로를 응원하며 떠나기도 너무나 차갑게 돌아서기도 하는 것이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길 같았다. 그림으로 보는 길은 아름답기도 매정해보이기도 하나 그럼에도 주인공은 걸어간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처럼 말이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주인공과 그림만 주어진 책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활자를 읽는 것 보다 더 오랫동안 책을 펴들고 책의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그리고 곳곳에 나의 이야기를 집어넣고 다양한 생각을 달아본다. 책을 펼칠 때마다 다른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 교훈들이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는 경우가 많았다. 부지런하고 노력하는 자가 결국 해냈고, 착하고 선하게 사는 자가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등의 이야기들은 가치관이 흔들릴 때면 나를 정립해줬던 것 같다. 저 마음 깊숙한 곳에 남겨진 이야기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림책은 어린이들 것’ 이라는 생각에 어느 시점부터는, 다양한 글을 읽을 수 있는 청소년기 때부터는 그림책, 동화책 종류들을 다시 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림책은 그 어떤 책들보다 따뜻해서 일상에 치여 가장 중요한 진리를 놓치고 사는 어른들에게 가장 필요한 책이었다. 당장 눈앞에 놓인 과제들을 해쳐나가느라 간과하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상기시킬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내 이야기와 내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어른들에게도 그림책을 권유하고 싶다. 그림책 속의 공백들이 온전히 나의 생각을 채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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