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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연재 Oct 16. 2021

무상 속 무소 찾기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주말 저녁 모처럼 시간이 나서 탄천 주변으로 자전거를 탔다. 아내도 처가 쪽 가족들과 여행을 간 터라 이번 라이딩은 혼자서 였다. 올해는 10월에 접어들었는데도 더위의 기세가 꺾이질 않는다. 잠을 자려면 선풍기가 필요하고, 운전 중에도 심심치 않게 에어컨을 켜야 하니 말이다.


온기가 남은 가을 황금빛이 탄천 옆에 천지로 핀 들꽃에 내리쬔다. 가을에는 코스모스. 한들한들 거리며 코스모스가 휑하며 달리는 내 자전거 바람을 즐긴다. 아내와 갈 때는 도란도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가다 보니 중간중간 쉬기도 하는데, 혼자이니 쉼 없이 달린다. 한참을 가다 보니 다리 밑에 시원하고 청량하게 흐르는 시냇물이 휴식을 유혹한다.


라이딩할 때 챙기는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당겼다. 훅하며 수분이 목줄기를 넘어 대장 밑까지 빨려 들어간다. '내 몸이 수분을 원하는구나' 평소 편안한 집안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수준의 갈증이다. ‘그동안 참 운동을 안 했구나' 이런 기분이 오랜만이니.


운중천 시냇물이 흐른다. 채 30cm도 안 되는 물 깊이지만 주변 갈대숲을 다 적시고 절대 끊어지지 않을 수량을 머금은 듯 쉼 없이 탄천 방향으로, 한강 방향으로 흐른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 하구나. 늘 강이나 바다를 보면 불교의 가르침 중 하나인 제행무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저 강은 매일 흐르고, 저 바다는 매일 저렇게 쉼 없이 파도로 모래사장을 때린다. 하지만 잠시 전의 저 강과 바다는 지금의 강과 바다는 아니다. 모처럼 만의 탄천 라이딩에서 공기를 휘감은 가을 기운과 간간히 시든 나무 잎과 활짝 핀 들꽃이 다시 한번 내게 가르침을 속삭인다. 제행무상!


나는 어릴 적 바닷가 근처의 마을에서 자랐다. 내가 살던 곳에는 오십천이라고 부르는 나름 규모가 있는 강이 있었다. 그 강은 바로 동해 바다로 이어졌고, 나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마을에 살았다.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 배우는 대표적인 반농반어촌이 내 고향이다. 몇 살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번은 엄청나게 큰 비가 몇 날 며칠 동안 퍼부었다. 꼬마들은 비가 오면 괜스레 신난다. 고무장화를 신고 강둑 위에 올라 무섭게 내리치는 황톳물의 오십천을 바라본다. 마치 임박한 큰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처럼. 그때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폭우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위력이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무섭게 내달리는 오십천은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되찾고 우리 옆을 그저 달리겠지. 왜 저 강은 날마다 모습을 저리 바꾸는 거지?' 이제 막 초등학교 초년생이던 내가 이해했던 제행무상의 모습은 그랬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15~?)와 플라톤은 이데아와 이상향을 말했다. 스치듯 도덕이나 윤리 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다. 변하는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 국민학교 산수 시간인가 cm의 개념을 배운 적이 있는 것 같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절대적인 1cm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떠올랐다. 철도의 철길도 더울 때는 늘어나고 추울 때는 오그라드는데 언제나 어디서나 통용되는 절대적인 1cm가 가능할까라는 그런 의문이다. 사실 1cm가 완벽하지 않으면 나머지 길이는 기준이 없게 된다. 나중에 보니 이런 기준을 정립하고 도량형의 표준을 관리하는 나름의 국제적인 기구가 있었다.


언제나 변한다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우위를 따지기 힘든 복잡 미묘한 것이 있는 듯하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하는 대사도 이런 맥락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이맘때 작년 가을에 첫째 아들이 해병대에 입대했다. 코로나로 한참 휴가를 못 나오다가 지난주에 나와서 1주일 함께 지냈다. 사실 휴가를 나와서 집에 있는다고는 하지만 눈뜬 모습을 본 건 1주일 중에서 채 며칠이 되지 않는다. 젊은 친구는 쉼 없이 바쁘다. 훌쩍 휴가 기간이 지나 포항 자대로 떠나기 위해 KTX 광명역으로 아들을 배웅해 주었다. 기차가 떠날 때까지 함께 있었는데, 1년 새 아들은 더 늠름해지고 군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듯 영 가기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우리 아들도 이렇게 자랐구나'


3년 전 회사를 창업하고 쉼 없이 달렸다. 매출과 이익이 매년 두 자릿수 이상 성장하며 AI 분야의 전문 컨설팅회사로 이름을 알 정도로 회사는 성장했다. 다시 돌아서 또 회사를 해 보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시작할 때만큼의 힘과 정열을 불태울 수 있을까? 사실 모르겠다. 인생이 쉽지 많은 않아서인지 과거를 되돌려 다시 시작해 보라고 하면 자신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내 삶에 후회가 없다.


라이딩을 어느 정도 마칠 무렵 풍성하게 자란 나무 아래 잠시 쉬기 좋은 그늘이 보였다. 자리를 펴고 준비해 온 포도를 먹으며 탄천 자락을 바라보았다. 온갖 이름 모를 풀들이 시냇물 주변을 덮고 있다.


잠시나마 반백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제행이 무상한데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 불교의 유명한 문장에서 '무소의 뿔처럼 가라'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한영애라는 가수가 수십 년 전에 이를 테마로 한 노래도 갑자기 기억이 났다. 제목은 '코뿔소'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흐르는 데로만 그저 흘러가는 생을 산다면 과연 '무소'가 될 수 있을까? 인생은 철저히 혼자되어야 하고 또 그 혼자의 길을 걸을 때 가장 충만하고 행복하다고 어떤 철학자는 말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나만의 무소다운 모습을 가지려고 의식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던가? 그리고 점점 더 무소 다워지는 것이 나 다워지는 것일까?


강산애 노래 중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들처럼'이라는 노래가 있다. 요새 젊은 친구들과 노래방을 가면 이 노래를 모른다. 아무튼 살아 있다는 건, 인생을 산다는 건. 제행이 무상하게 흐르는 모습 속에서 자신만의 무소의 모습을 지키려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호호(昊昊)야, 자신만의 인생을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가길 바란다. 그냥 사는 게 인생 같지만 사실은 순리대로 살면서 자신의 '무소'를 찾는 게 인생길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아빠도 마찬가지로 찾아왔고 앞으로 남은 인생도 이 길을 찾아가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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