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종합시험을 마치고

by 명연재

시계는 저녁 8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보다 귀가가 한 시간 늦었다. 4월 둘째 주 토요일, 대학원 종합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출문제 몇 개를 훑어본 뒤 연구실 문을 나섰다.


작성 중이던 논문은 잠시 미뤄둔 채, 한 달 가까이 시험 준비에 올인했다. 학위를 먼저 취득한 주변 박사들이 귀띔해 준 말이 떠올랐다.

"나중에 교수가 되면 종합시험 과목 중 두세 개는 직접 강의하게 될 거예요. 미래를 대비한다는 마음으로 공부하세요."

나는 강단에 선 내 모습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소화했다.


박사과정 3년 차,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속은 달랐다. 바람 한점 없는 적도 부근의 바다, 유리 같이 투명하면서도 숨 막히는 고요 속에 나는 홀로 떠 있었다. 실낱같던 무급휴직 연장은 끝내 불발됐고, 이제 나는 공식(?) 실업급여 수급자라는 이름을 달았다. 신분을 증명할 적(籍)이 사라진 두려움, 아니면 전 직장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때때로 나의 바다엔 뇌우(雷雨)가 찢어댈 듯 울어댔다.


그럴수록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다. 지혜와 사랑 가득한 조언이 간절했다. 하지만 내 상황을 이해시키려면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했다. 휴대폰 속의 이천여 개의 연락처, 어느 이름도 선뜻 누를 수가 없었다.


종합시험 당일, 나는 소박한 생존키트를 챙겼다. 김밥 한 줄, 가나 초콜릿 두 개, 바나나 우유 한 개, 오렌지 주스 한 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냉수 한 병.


시험은 9시에 시작해 오후 6시까지 이어졌다. 답안지를 제출하러 일어선 건 오후 5시 30분. 여전히 머리를 싸매고 답안지를 작성 중인 학생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장장 아홉 시간에 달하는 시험이 끝나니 후련하고 띵했다.


학력고사 이후 근 삼십 년 만의 마라톤 시험이었다. 교정을 터벅터벅 나서 벤치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박사과정의 또 다른 고비 하나가 끝이 났구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2012> 스틸 컷


그날 밤, 막걸리 두 통에 순대와 진미채 볶음으로 소박한 술상을 차렸다. 소파에 기대앉아 영화 <라이프 오프 파이, 2012>를 보면서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술기운 속에 나는 영화의 환영 속으로 빠져들었다. 수천 마리 해파리가 별빛처럼 피어오르고, 심연을 가르며 거대한 고래가 솟구쳐 달빛을 머금은 물보라를 흩뿌렸다. 아름다웠다. 나는 어느새 주인공 파이가 되어 있었다.


내가 가는 길은,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하늘 아래는 오직 두 명만이 지지했다.


5월 9일, 사상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치러졌다. 41.1%의 득표율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벚꽃이 지자 이팝나무엔 하얀 눈꽃이 내렸다. 저녁을 먹고 연구실에 앉으니 한 편의 시가 떠올랐다. 부끄러운 시를 아내에게 카톡으로 보내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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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돌아보니


돌아보니,

내 나이 어느덧 사십 중반을 넘었다

아무리 힘껏 살아도

앞으로의 날이 살아온 날보다 길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병들어 너무 힘겹다면

굳이 더 머물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생은

수많은 조각들이 실이 되어 퍼즐처럼 맞춰지는

영롱한 듯 희미한 한 폭의 인상화풍 그림이었다.


돌아보니,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나 싶다

늘 마음속에 품은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저 슬픈 심연(深淵)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리라


매 순간이 선택이었고

또 하나의 기회였건만

정작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도 나를 보고 있는가?


돌아보니,

참 많이 걸어왔다

잘한 일보다 못한 일

후회스러운 일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럼에도 지나온 발자취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 있다.


돌아보니,

한 여자가 곁에 곤히 잠들어 있다

스무 해 넘게 나를 믿고 걸어온 사람

두 아들을 낳고

알뜰살뜰 가정을 지켜온 사람


요즘 따라 더 미안하다

세상 누구보다 이 여자에게 더

이 여자는

과연 알았을까?

이토록 고단할 줄 알면서도

나를 믿고 따랐을까?


돌아보니,

눈물이 난다

내 인생의 편린(片鱗)마다

반짝이는 슬픔이 박혀 있다.

웃으면서도 목청껏 웃지 못하는


돌아보니

참 우습다

이토록 무지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모진 세월을 견뎌왔을까?

그러니 우스운 것이고

그러니 운이 좋은 것이다


돌아보니,

참 외롭다

이어질 듯 끊어지고

끊어진 듯 이어지는 관계들

그걸 붙잡으려

또 거기서 위안을 찾으려

애쓰는 내가 애처롭다.


돌아보니,

참 가당치도 않다

만약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걸어올 수 있었을까?


너무 힘들어서

아니면 너무 우스워서

아니면 너무 말도 되지 않는 걸 알기에

차라리 첫걸음조차 떼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보니,

누가 시킨 것도 아닌

결국은 내가 택해 걸어온 길

알아서도 가고

몰라서도 가는 길

그저 각자의 짐을 멘 채

그저 그렇게


돌아보니,

지금의 내가 보이고

앞으로의 내가 아련히 보인다

결국은 아무 흔적도 없이

잊히고 사라질 나


머리로는 생각하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대부분은 부질없다

정말 간절한 소망만이

흔들리면서도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그런 단단한 심상(心想) 만이

생(生)의 답을 구한다.


돌아보며,

내게 묻는다

너는 마음속에 어떤 촛불을 품고 있었느냐


보인다.

먹고살기 위한 “생존” 의 촛불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수많은 위성 촛불들


어떤 촛불은 평생 꺼지지 않았고

어떤 촛불은 시절을 달리하며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뭐라 말하지 않아도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맞는 말이나

그건 어쩌면

모른다는 말과 별반 다를게 바 없는 건 아닌지.


돌아보니,

반백년을 살아왔지만

지금 분명한 건 거의 없다.


인생이란 그저

마음속 허깨비를 붙잡으며

주어진 순간을 소화해 내는 여정 정도가 아닌지


그러니

선택할 수 있다면 선택하고

끝내 자기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나 잘난 맛에,

나 편한 대로 살아간다고.


--- 2017년 05월 23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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