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신뢰 자산으로 통한다
PM으로 일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 내 말은 잘 안 먹히지?'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어떤 동료 PM의 아이디어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데, 왜 내가 논리적으로 문서를 빡세게 준비해 가도 메이커들을 설득하는 건 항상 이렇게 힘들까.
단순히 논리나 데이터가 부족해서? 아니면 내 경험이 부족해서?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은 PM의 실력과 직결되는, 하지만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신뢰 자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특히 새로운 환경에 놓인 PM이라면 더더욱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다.
PM의 업무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뭘까? 여러 답이 있겠지만, 나는 '설득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싶다.
PM은 혼자서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 개발자, 디자이너, 마케터, 데이터 분석가 등 수많은 메이커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을 움직여야 한다. 즉, 메이커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설득하느냐가 PM의 실력과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발생한다. 똑같은 아젠다, 비슷한 논리인데도 PM에 따라 메이커들의 반응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PM은 아이디어 스케치 수준만 가져와도 "오, 좋은데요? 한번 해보시죠!"라는 반응을 얻는 반면, 어떤 PM은 아무리 상세한 분석과 기획 문서를 들이밀어도 "글쎄요...",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같은 미적지근한 반응만 얻기 일쑤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바로 '신뢰 자산(Trust Asset)의 차이' 때문이다. 이름 그대로, 당신이 주변 동료들로부터 얼마나 '믿을 만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무형의 자산이다.
이 신뢰 자산이 두둑한 PM은 설득에 드는 비용이 현저히 낮다. 그의 말에는 이미 '믿음'이라는 보증수표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반면 신뢰 자산이 없는 PM은 매번 자신의 논리와 근거를 증명해야 하는 고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똑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더라도, 신뢰 자산의 크기에 따라 투입해야 하는 노력과 시간은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신뢰 '자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건 처음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꾸준히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다. 마치 은행 계좌처럼 말이다.
신뢰 자산을 쌓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1. 내부적으로 쌓는 법
내부적으로 쌓는 법은 아주 정직하다. 바로 성공 경험의 축적이다. 당신이 주도한 프로젝트가 좋은 성과를 내고, 그 과정에서 동료들과 긍정적인 협업 경험을 반복적으로 쌓아나갈 때 신뢰 자산은 자연스럽게 불어난다. 처음에는 당신의 제안을 반신반의하던 메이커들도, 당신과의 협업을 통해 '아, 이 사람이랑 일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구나'라는 학습을 하게 된다. 이게 바로 흔히 말하는 '팀워크가 쌓인다'는 상태다.
2. 외부적으로 쌓는 법
반면 외부적으로 얻는 법도 존재한다. 다소 불편한 진실이지만 후광 효과, 즉 당신의 백그라운드가 초기 신뢰 자산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신이 이전에 어떤 회사에서 일했는지, 얼마나 경력이 있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심지어는 얼마나 신뢰감 가는 인상을 주는지 같은 요소들이 당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초기 신뢰도를 형성한다.
같은 10년 차 PM이라도, 구글에서 성공적인 프로덕트를 리딩했던 사람과, 이력서에 성공 경험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작은 스타트업만 전전했던 사람의 말 무게가 처음부터 같을 리 없다. 잔인하게 들릴지 몰라도 현실이다.
신뢰 자산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다. 따라서 PM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신뢰 자산을 관리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정도는 없다.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당연히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좋은 결과물을 꾸준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신뢰 자산을 단기간에 쌓으려는 조급함은 버리는 게 좋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신뢰 자산은 '쌓는 것'만큼이나 '잃지 않는 것' 이 중요하다. 동료들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정적인 경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다. 한번 금이 간 신뢰는 회복하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고, 무리한 일정이나 요구사항으로 동료들을 번아웃시키지 않으며, 문제 발생 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 등이 신뢰를 지키는 기본이다.
자, 이제 본론이다. 당신이 PM으로서 새로운 회사, 새로운 팀에 합류했을 때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바로 이 '신뢰 자산'을 확보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미 시장에서 인정받는 경력과 화려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PM이라면, 어느 정도 초기 신뢰 자산을 안고 시작할 수 있다. 팀원들은 당신에게 기대감을 가질 것이고, 당신의 의견에 좀 더 귀 기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니어 PM, 혹은 새로운 도메인으로 옮긴 PM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당신은 아직 증명된 것이 없는 상태다. 당신의 최우선 과제는 거창한 비전을 제시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고 함께 일할 만한 동료다' 라는 신뢰를 얻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초반에 무리하게 큰 프로젝트나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며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려 드는 것이다. 의욕이 앞서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건 최악의 선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왜? 첫째, 당신은 아직 회사의 제품, 문화, 정치, 히스토리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당신 눈에는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사실은 복잡한 배경과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걸 무시하고 다짜고짜 칼을 댔다간 기존 멤버들의 반발만 살 뿐이다.
둘째, PM으로서의 의사결정 능력은 상당 부분 경험에서 나온다. 당신이 아무리 똑똑해도, 새로운 환경에서 처음 내리는 큰 결정이 성공적일 확률은 생각보다 낮다. 실패는 신뢰 자산을 깎아 먹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Small Wins' 다. 처음부터 홈런을 노리지 말고, 작지만 확실한 성공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이다. 팀원들과 함께 작더라도 의미 있는 개선을 만들어내고, 긍정적인 협업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Small Win'은 꼭 거창한 제품 기능 개선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흩어져 있는 문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거나, 비효율적인 회의 방식을 개선하거나, 팀원들과의 1:1 미팅을 통해 그들의 고충을 경청하고 해결을 돕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제품 과제를 통해 성과를 보여줘야 하지만, 초기에는 이런 작은 성공들을 통해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당신의 신뢰 자산이 아직 부족해서 동료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면, 다른 사람의 신뢰를 빌려오는 방법도 있다. 팀 내에 이미 두터운 신뢰를 받는 시니어 PM이나, 개발 리드, 디자인 리드와 같은 핵심 인물이 있다면, 그들의 지지를 먼저 얻어내는 것이다. 그들의 지지 선언은 당신의 제안에 강력한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물론, 이것도 공짜는 아니다.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당신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PM에게 신뢰 자산은 공기와 같다. 너무 당연해서 평소엔 그 중요성을 잊기 쉽지만, 부족해지는 순간 모든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설득이 어려워지고, 협업이 힘들어지며, 결국엔 좋은 제품을 만들 기회조차 얻기 힘들어진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PM에게, 초기 신뢰 자산 구축은 그 어떤 과제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조급해하지 말고, 작은 성공들을 통해 동료들의 믿음을 얻어 나가자. 그렇게 쌓인 신뢰는 당신이 더 큰 도전을 하고 더 큰 성과를 만들어내는 가장 든든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잊지 말자. 모든 길은 신뢰 자산으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