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파트너십의 가능성과 한계
※ 2024년 1년 간의 인도 생활, 그 전후 진행했던 인도에 대한 학습과 연구를 바탕으로 K콘텐츠아카데이포럼의 기관지 KIWI에 썼던 글입니다. 인도 진출, 인도 업체와의 협업을 진행 중이거나 계획하고 있는 우리나라 콘텐츠 기업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인도는 연간 1,700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하는 세계 최대의 영화 제작 국가로 숙련된 인력과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최근 ‘범인도(Pan-India) 영화’의 유행은 인도 내에서도 다양한 지역과 언어권이 협업하는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콘텐츠 기업에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남인도(텔루구·타밀권) 중심의 영화 산업 성장이다. 힌디어 중심의 볼리우드와 달리, 텔루구·타밀 영화는 최근 글로벌 OTT를 통해 국제적 인지도를 확보하며 ‘탈델리, 탈뭄바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이 지역은 기술 인프라, 콘텐츠 수출 기반, 시각효과(VFX) 역량에서 비교적 앞서 있으며, 실제로 최근 몇 년간 한국과의 공동제작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화 산업의 기반은 풍부한 원천 스토리(IP)이다. 인도는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와 같은 세계적인 서사시를 포함해, 영화, 드라마로 발전시킬 수 있는 깊고 풍성한 역사와 신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인도는 VFX·애니메이션·게임 등 디지털 콘텐츠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재 풀과 제작 역량을 확보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강력한 원소스 IP, 포맷 기획력, 글로벌 팬덤 기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양국은 서로의 보완적 강점을 바탕으로 공동제작, 공동기획, 기술 교류, 인력 연계 등 다양한 협력 포인트를 발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도 콘텐츠 기업들은 한국의 웹툰·웹소설 IP를 로컬화하거나 OTT 시리즈로 재해석하는 데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공동 사업을 진행한 인도 기업들이 한국의 포맷 및 스타일을 현지 스타와 결합하는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며, 글로벌 OTT의 관심도 높다. 또한 AI를 활용한 로컬라이징 기술, 버추얼 프로덕션 등 신기술 분야에서도 한국-인도 간 공동 실험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기회의 땅에는 분명한 현실적 과제들이 존재한다. 가장 큰 장벽은 견고한 자국 문화 중심의 시장이다. 인도 영화 시장의 85~90%는 자국 영화가 차지하고 있으며, 22개의 공식 언어가 사용될 만큼 문화적·언어적 다양성이 커 통일된 전략을 구사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수익화의 구조적 어려움이다. 인도 소비자들은 가격에 매우 민감하며, 합법적인 무료 채널이나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서라도 콘텐츠를 무료로 소비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서울대 남아시아센터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의뢰로 실시한 인도의 한국어 수강생 대상 조사에서도 K-팝을 듣기 위해 유료 구독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26.8%에 불과했으며, 취약한 IP 보호 환경은 가짜 굿즈 유통과 같은 직접적인 수익 감소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예측 불가능한 정책·규제 리스크이다. 현 인도 집권당의 힌두 민족주의 성향은 외국 문화에 배타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잠재적 리스크이며, 인허가 등 복잡하고 불투명한 행정 절차와 대규모 콘서트를 열기 힘든 인프라의 부족은 우리 기업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이다.
인도가 모든 면에서 ‘당장’ 준비된 파트너는 아니다. 지역 간 문화 차, 다언어·다종교 구조, 불투명한 규제, 낮은 콘텐츠 지불 의사 등 여전히 높은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 동시에 경제 규모, 인구 구조, 디지털 인프라, 산업 기반 등 많은 지표는 인도를 ‘기회의 땅’으로 지목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가능성과 한계를 종합할 때, 우리 문화콘텐츠 기업들이 인도 시장 진출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협력을 통한 현지화 전략(Collaborate, Don't Just Export)이다. 일방적인 콘텐츠 수출이 아닌, 인도의 풍부한 IP를 활용한 공동 제작(Co-production)을 최우선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일본-인도 합작 애니메이션 <라마야나>의 성공은 한국의 뛰어난 제작 기술과 인도의 방대한 서사를 결합하는 것이 현지 관객의 공감대를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보여준다. 이는 85~90%에 달하는 자국 영화 점유율을 뚫고, 현지 문화 존중을 통해 정치적 리스크를 완화하는 현실적 해법이다.
디지털 중심의 수익 모델 다각화(Diversify Business Models) 전략도 필요하다. 유료 구독에만 얽매이지 말고 광고 기반 무료 모델(Freemium), 게임 내 소액결제 등 인도의 소비 성향에 맞는 유연한 수익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인디아(BGMI)>의 성공은 디지털 게임 시장의 엄청난 잠재력을 증명한다. 또한, 인도 정부의 'Make in India' 정책과 연계하여 공식 굿즈를 현지에서 생산하는 B2B 협력은 IP 침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택과 집중'에 기반한 단계적 시장 진출(Phased & Focused Entry) 전략이다. 인도 시장이 선호하는 특정 장르(공포, 스릴러 등)에 집중하여 성공 사례를 만들고, ODA(공적개발원조)와 연계한 현지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장기적인 파트너십과 우호적 기반을 구축하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리스크를 최소화하며 시장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현명한 방식이다.
이글을 쓰면서 인도에 대한 큰 관심에 비해 아직 인도 콘텐츠산업과 한류 현황에 관한 한국어 자료가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서울대학교 남아시아센터가 KOCCA 인도센터와 협력해 작성한 자료들이 거의 전부이다.
이 때문에 위에서 제시한 협력 전략도 이 자료들에 대한 분석과 필자의 현지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낸 아이디어스케치에 가깝다. 향후 인도 현황 분석에 탁월한 전문가들과 콘텐츠산업 전문가들이 함께 정밀하고 지속가능한 전략을 수립하는기회가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