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 전략, 미래 비전 확보 전략과 KOCCA의 역할 (1)
‘애플 생태계’, ‘안드로이드 생태계’, ‘조선산업 생태계’, ‘K-콘텐츠 생태계’ 등등… ‘생태계’라는 용어가 유행이다. 너무 흔하게 쓰여 슬로건에나 쓰는 상투적 수사(cliché)처럼 들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개념의 본질을 이해하면 산업 전략과 정책의 정합성을 놀라울 만큼 끌어올릴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 글에서는 자연과학의 ‘생태계’ 개념을 콘텐츠산업에 적용해, 한국 콘텐츠산업의 기회와 과제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콘텐츠산업이라는 ‘숲’을 관리하는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이 새로운 정부의 새로운 정책 목표 아래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짚어본다.
생태계(Ecosystem)는 원래 상호작용하는 식물, 동물, 미생물과 같은 생물군과 토양, 공기, 빛 등 비생물 환경이 에너지와 물질을 주고받으며 얽힌 복합 체계를 일컫는 자연과학 용어다.
산업에서의 생태계는 이 개념을 차용하여, 기업·창작자·플랫폼·정부 등 여러 독립된 주체가 표준이나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가치를 공동 창출(Co-creation)하는 개방형 네트워크를 말한다.
과거에는 산업의 ‘공급망(Supply Chain)’이 중요했다. 이는 재료를 투입해 제품을 만드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단가와 납기만 잘 맞추면 되는 선형적인 구조다.
오늘날의 산업은 다르다. 소비자까지 아우르는 산업 주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더 큰 가치를 만드는 복잡한 네트워크, 즉 ‘비즈니스 생태계’가 되었다. 마치 다양한 생물이 얽혀 살아가는 숲과 같다.
이 개념은 1990년대 초 제임스 F. 무어(James F. Moore)가 대중화했고, 이후 플랫폼·네트워크 효과·모듈화·거버넌스 관련 논의와 결합해 확산했다.
굳이 왜 ‘생태계’라고 부를까? 세 가지 면에서 자연 생태계와 꼭 닮았기 때문이다. 첫째,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스마트폰의 가치가 수많은 앱(보완재)에서 나오듯, 이제 기업의 성공은 혼자가 아닌 파트너들과의 협력에 달려있다.
둘째, 환경이 성장을 좌우한다. 표준, 개발도구 등 좋은 ‘환경’을 잘 깔아주면, 파트너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판이 커진다. 셋째, 나비 효과가 발생한다. 생태계 속 한 플레이어의 정책 변화가 거미줄처럼 얽힌 다른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콘텐츠산업을 생태계의 눈으로 보면, 단기 흥행을 넘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더 긴 호흡의 목표가 선명해진다. 지속가능성은 단지 오래 버티는 능력이 아니라, 충격을 받아도 회복하고 다시 성장하는 힘, 즉 회복탄력성과 재생 능력을 의미한다. 생태계 관점은 이 힘을 어디에서 만들고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보여준다.
자연 생태계의 세 가지 축은 토양, 유기체, 그리고 대기이다. 이를 콘텐츠산업에 그대로 적용하면, “어떤 기반을 깔아야 하고(토양), 누가 가치를 만들며(유기체), 무엇이 성패의 환경을 좌우하는가(대기)”가 한눈에 보인다.
토양은 작품과 기업이 자라기 위한 기반이다. 교육과 훈련으로 인력을 키우고, 정책금융·보증 같은 자금줄로 초기 위험을 낮추며, 스튜디오·후반 작업실 등 물리 인프라가 품질과 납기를 안정시킨다.
여기에 자막·접근성·메타데이터·권리 스키마와 같은 표준, 그리고 콘텐츠·시장 통계를 비롯한 데이터가 더해지면, 파트너들이 같은 언어로 협업하고 해외 유통과 추천 알고리즘에도 유리해진다.
농사에서 비옥한 흙이 씨앗의 생존률을 좌우하듯, 탄탄한 토양은 같은 아이디어라도 더 빠르고 크게 자라게 만드는 것이다.
유기체는 말 그대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생명체들이다. 창작자와 제작사, 배급사와 플랫폼, 그리고 드라마·영화·웹툰·게임 같은 IP가 핵심 몸체를 이루고, OST·굿즈·전시·투어·게임 콜라보 같은 보완재가 옆에서 영양을 공급한다.
하나의 웹툰 작품이 드라마, 게임, 콘서트 등의 다른 포맷으로 번식하듯 확장될수록 생태계 전체의 에너지가 커진다. 팬덤이 만드는 밈·리뷰·커버 영상 같은 UGC는 자연 도달률을 끌어올리고, 크리에이터와 스타트업의 툴·마케팅 테크는 제작과 유통의 효율을 높인다.
서로 공생하고 때로 경쟁하면서 균형을 찾아가는 이 역동성 자체가 산업의 성장 플라이휠을 돌리는 것과 같다.
대기는 성공을 담보하는 날씨다. 저작권·노동·세제처럼 규칙을 정하는 제도, 국가별 심의·통관·비자 같은 행정 절차, 플랫폼·앱스토어의 정책과 추천 알고리즘, 소비 트렌드와 환율·금리, 그리고 AI 번역·QC·추천이나 신코덱과 같은 거대한 기술의 물결이 여기에 속한다.
작품과 기업이 아무리 건강해도 맞바람이 불면 속도가 붙지 않고, 순풍이면 작은 배도 멀리 간다. 그래서 기업과 기관은 채널 정책 변화에 대비한 대체 경로, 국가별 규제 리스크 맵, 환율·광고단가 변동과 다변화에 대한 대응 수단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 날씨를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읽고 대비하는 능력이 경쟁력이다.
생태계 관점을 콘텐츠산업에 실제로 적용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우선, 병목현상이 있는 곳을 쉽게 볼 수 있다. 토양·유기체·대기로 나눠 보면 우리 산업에서 지금 가장 마른 땅이 어디인지, 즉 인재인지, 자금인지, 표준과 데이터인지가 드러난다.
성장 플라이휠도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 토양을 보강해 실패 확률과 리드타임을 낮추고, 유기체의 파생·보완재 확장을 촘촘히 연결하며, 대기의 변동성에 대비한 대체 경로를 미리 열어두면, 개별 작품의 성패와 무관하게 산업 전체의 속도가 유지된다.
마지막으로, 지속가능성을 측정 가능한 지표로 관리할 수 있다. 한 플랫폼·한 국가에 대한 매출 의존도를 줄이고, 파생 포맷으로의 전환 비중을 늘리며, 팬덤의 자발적 참여가 가져오는 재방문과 시청 완료 비율(완시율)의 개선을 꾸준히 관찰하는 과정 자체가 산업의 체력을 키운다.
결국 지속가능성은 “한 번 크게 터뜨리는 법”이 아니라 “다음 기회가 자연히 이어지게 만드는 설계”에서 나온다. 비옥한 토양은 실패 비용을 줄이고, 다종다양한 유기체는 수익원을 나눠 리스크를 분산하며, 변화무쌍한 대기에 대비한 항로는 외부 충격에도 속도를 잃지 않게 한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