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어둠은 뚜꺼운 솜 이불을 올려 덮어쓴 채 전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산 능선 쪽에서부터는 발악하듯 싸늘한 잿빛 광채가 싸락눈처럼 산광하며 살을 애는 찬 기온을 아래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나는 익숙한 잰걸음으로 그 빛을 향해 걷는다.
능선을 향해 난 신작로 위, 간간이 박혀있는 전봇대들을 지나친다.
전봇대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등불. 그
아래 동그랗게 빛무리가 그려져있다.
징검다리를 밟듯 나는 조심스레 그 빛 위를 밟으려다 뒤뚱거렸다. 착각이었을까...
숨이 목구멍에서 깔딱거릴 즈음,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능선 아래를 굽어본다.
낙동강 위를 가르는 낙동대교. 어둠을 헤집고 더문더문 달리는 화물차와 승용차. 채 졸음을 떨치지 못한 듯 움직임이 둔하다.
화물차는 아마 서울로 갈 것이다.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들 이마에 안타까운 입김을 남기고 서둘러 집을 나섰을 아빠.
그는 어젯밤도 늦게 들어와, 엎드린 채 잠든 아이 얼굴 옆에 놓인 일기장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아빠 꼭 깨워줘. 보고 싶어요. 꼭."
미안한 아빠는 아이를 차마 깨우지 못했다. 아이를 바로 뉘며 항상 그랬듯 볼에 입 맞추고 눈시울만 붉혔을 것이다.
불과 다섯 해 전, 나 또한 그랬다.
몸속 어딘가가 파르르 떨린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마른 잔숨이 바닥날 때까지 천천히 길게 내쉰다.
그리고 목을 길게 내밀어 허공에 건다. 코끝으로, 저 어디쯤 있을 한 줌 신선한 공기를 끌어당기려는 절박한 몸부림처럼 킁킁거린다.
귀속을 아리는 먹먹함이 서서히 조여 온다.
이제 계절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변화를 준비한다.
자못 거룩하고 숭고하며, 장엄하기까지 하다.
주위는 고요하고 바람 한 점 없다.
정막과 긴장이 흐르고, 한동안 모든 사물과 우주가 움직임을 멈춘 듯하다.
한 번 더 길게 들이쉰 숨. 과연 언제까지 참고 견딜 수 있을까.
고통과 답답함 속에서, 희뿌연 기억과 환상이 뜬구름처럼 떠다닌다.
'힘들면 지난 것은 묻어두는 게 어때. 사는 것이 고통스러우면 잠시 쉬는 것도 괜찮아.'
저만치 둥근 조명 아래 노란 눈송이들이 내려앉아있다.
어젯밤 눈이 왔던가?
그런데 눈이 왜 노랄까?
가까이 가서 보니, 떨어진 은행잎이 전등 빛을 받아 마치 노란 눈송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은행잎 사이사이에는 마른 낙엽도 쌓여 있었다.
나는 그 위를 밟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
가느다란 비명 같은 뒤틀린 소리가 발밑에서 겨우 빠져나와 허공 속으로 흩어진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귓전에 오래도록 머물다 바람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할 말이 무엇일까.
"난 용도가 다해 버려지는 쓰레기가 아니야."
"난 쓰다가 마음이 바뀌어 던져지는 휴지 조각이 아니야."
"난 낙엽이야."
"버려지는 마당에, 낙엽이면 뭐가 달라?"
"낙엽이 되는 건 끝이 아니라 다음으로 가는 시간이야."
"고엽이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고 떠나는 거지."
"낙엽이 되어야 고목은 겨울을 나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지. 그곳에 새순을 틔우고 열매를 맺으며 비로소 그 나무로서 세상에 존재하려는 숭엄한 행위야."
능선을 따라 여명이 밀려내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의 앙상한 나무 가지들이 드러낸다.
전등불 아래 낙엽을 밟고 선 나의 마른 얼굴 윤곽도 빛에 반사되어 뚜렷해진다.
마치 전등 빛이 "너는 뭐해?" 하며 등을 떠미는 듯하다.
"여태 뭐하고 살았어? 말해봐!"
"..."
할 말이 없다.
슬그머니 등을 비추는 불빛을 피해 나무 뒤로 숨었다.
발밑에 있던 낙엽들이 굴러 저만치 멀어지더니 나를 응시한다.
"뭐해? 말해봐!"
"..."
나는 고개를 숙여 뒤돌아 자리를 뜬다.
아무 말도 못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