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마지막 편)

첫사랑

by 용가리사내

3학년이 되자 왠지 모르게 모두가 어수선하고 바빠 보였다. 나 역시 분주히 움직이는 아이들 틈에 섞여 자연스레 바삐 움직였다. 아니 바쁜 척을 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들과 호흡을 맞추며 어울릴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아이와는 더 멀어질 것이라는 섣부른 예단이 내 마음을 불안하고 아프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일부러 등교 시간을 평소보다 늦추거나 서둘렀다. 등굣길에서 그 아이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아이의 책가방 속에 쪽지를 넣겠다는 생각도 접어야 했다. 왠지 나의 무모한 행동이 그 아이의 장래를 망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죄책감이 앞섰기 때문이다.

대학입시 준비에 마음이 붙지 않았다.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으로 이어졌고, 그 불안은 공부할 의욕을 갉아먹었다. 만약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그 아이와의 만남은 이제 완전히 끝나 버릴 것이라는 암울한 상상이 가슴을 짓눌러 고통스러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심한 감기몸살로 종일 끙끙 앓았다. 다음날 도저히 참지 못해 등굣길 언덕 위에 숨어 슬래브 집 대문을 지켜보며 몇 대의 버스를 그냥 보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그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픈 몸을 이끌고 선도부 앞에서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나는 보기 좋게 대학에 낙방했다.

예비고사는 겨우 턱걸이했으나 그 점수로는 가고 싶은 대학은 커녕 웬만한 4년제 대학조차 지원할 수 없었다. 집 밖을 나가기가 부끄러워 두문불출하는 나날이 시작됐다.


교복 후크와 맨 위쪽 단추를 풀고 어깻짓을 하며 충무동 왕자 극장 골목을 함께 누비던 '철수'는 전문학교에 합격한 뒤 머리에 포마드를 잔뜩 바르고 다녔다.

그놈에게는 재수를 한다고 둘러댔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좋은 대학에 합격했겠지. 이제 영영 그 아이의 모습은 볼 수가 없겠구나.....


햇빛이 나른한 초여름 어느 날 아침.

군대 간 큰형이 입던 잠바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볼 수 없을지라도 그래도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나를 집 밖으로 밀어냈다. 이대로 방 안에 틀어박혀 미쳐버리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늦은 아침이라 그 아이를 만날 거라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아이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혹여 남아있을지 모를 흔적을 느낄 수만 있어도 이 헛헛한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슬래브 지붕 집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는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혹시나....

멀리서 그 집이 보일 때까지는 대문 앞을 주시하며 걸었다. 하지만 막상 대문 앞에 다다르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대문은 굳게 닫혀 미동도 없었다.

높지 않은 담을 돌아갈 때는 바짝 귀를 대어 보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빠져나갔다.

언덕을 올라 보니 뜻밖에 버스가 서 있었다.

버릇이 돼버렸나... 주춤거리다 출발하기 직전 급히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앞쪽은 만 원이었고, 뒤쪽에 몇몇 사람이 서 있었다. 나는 앞쪽에서 엉거주춤 서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사람들이 서 있는 뒤쪽을 흘깃 스치려던 순간이었다. 그 사람들 틈 사이로, 기다란 머리를 목덜미 뒤로 가지런히 늘어뜨린 유난히 희고 작은 얼굴을 한 여자가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스쳤다.

순간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가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조심스레 겹눈질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분명 그 아이였다.

나는 두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두 갈래로 곱게 땋았던 머리는 풀려 귀를 덮었고, 단정한 교복이 대신 하얀 블라우스와 책가방 대신 핸드백으로 바꿨을 뿐 이목구비와 표정은 영락없이 그 아이가 맞았다.


그새 더 이쁘고 화사해졌구나....

혹, 나를 보았을까?


그 아이가 초라한 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나는 두 번째 정류장에서 내려 전봇대 뒤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나를 보지 않았겠지? 나를 알아보지 못했겠지...


이상했다. 그 아이의 집 대문을 계속 주시하면서 걸어왔는데, 분명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집 안에서는 전혀 인기척이 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버스를 탔던 걸까?


나를 내려두고 떠난 버스와 함께 가버린 그 아이의 무표정한 표정이 한참 동안 마음을 애달프게 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유난히 맑은 하늘은 파랬지만 햇살이 가득해 눈이 부셔 바로 볼 수 없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뜨거운 눈물 탓이었다. 버스와 반대 방향으로 먼 길을 돌아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모른다.


그 아이는 갑작스럽게 집을 팔고 '장림동'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문을 '철수'로부터 한참 후에야 들었다.

버스는 장림동을 거쳐 이곳 언덕을 지나갔다.

그 후로 그 아이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무수한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을 애써 들추지 않고 지냈다.

재수를 중단하고 군대를 다녀왔고,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을 시작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방통 대학을 겨우 마쳤다.

그침 없이 앞만 보고 달렸던 젊음의 열정도 공직을 은퇴하면서 늙고 낡아 버렸다.


언제부턴가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자연스레 주변을 살폈다. 어쩌다 사람들 틈에서 하얀 얼굴의 여자만 보이기라도 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증세는 아직도 낫지 않았다.


영영 이루지 못한 그 무엇이 뜬금없는 설렘을 불치병처럼 키웠을까...


언제나 지하철 안은 수많은 얼굴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겹쳐있다.

가끔 나의 시선은, 그리움에 저려 촉촉해진 채 낯선 얼굴마다 천천히 머물며 그 아이의 모습을 찾았다.


몇 해 전, 내가 살던 동네와 그 언덕을 찾았다. 가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집도

그 슬라브 집도

들뜬 마음으로 무수히 올라 다녔던 그 언덕도....

흔적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파트 숲과 그 뒤쪽으로 휑하게 뻗은 4차선 도로가 있을 뿐이었다.


하~ 이제는...


어디서 잘 살고 있을까...

그 아이는 여전히 희고 고운 얼굴로 늙지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