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2편)

첫사랑

by 용가리사내


지나간 1년처럼 새로 시작하는 이 해도 그렇게 흘러가 버릴까 조급해졌다. 변화도 발전도 없는 채로 또 한 해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아이에게 단 한 마디라도 말을 걸 수 있을까. 아니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수만 있어도 얼마나 좋을까. 어느덧 본격적인 대학 입시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 2학년이 되었다. 학업문제는 또 하나의 복병처럼 다가왔다. 이러한 부정적인 여건들은 나의 우유부단한 행동을 더욱 움츠려 들게 만들었고, 그 아이의 반응은 보나 마나 절망적일 것이 분명했다.

'그 아이는 언제나 단정하고 도도하니까, 내가 꿈도 꿀 수 없는 대학에 턱 하고 붙겠지...'


언제부턴가 그 아이의 깔끔하고 당당한 모습은, 늘 허술한 내 모습과 대비되기 시작했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그 아이의 집이 저만치 보인다든지, 우연히 그 아이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부끄러움을 넘어 주눅이 들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확인되지 않은 미래조차도 암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일부러 그 아이를 피할 것만 같았고, 그 아이는 점차 나를 잊어져 갈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이른 봄, 어김없이 언덕 비탈길 양옆으로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노란 꽃잎이 흔들리는 비탈길 사이로 그 아이가 도도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 달이 넘도록 보고 싶었다. 겨울방학은 너무 길었고, 고독했다. 집을 나서며 '혹여나 웃음 띤 하얀 그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겠지...' 발걸음은 서둘렀고, 마음은 한 것 부풀어 설레었다. 그러나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그 아이는 작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새로 페인트칠을 한 슬래브 지붕은 더 높아 보였고, 그 아이의 교복도 풀을 먹인 듯 빳빳하고 빛이 났다. 앞만 보고 걷는 그 아이의 옆모습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날 수업 시간은 유난히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평소보다 어려웠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비웃는 듯한 그 아이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유도 없이 그 아이가 점점 낯설어져 간다는 불안감이 강하게 마음을 짓눌렀다. 나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 아이는 거침없이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끝나는 걸까...

그냥 그만둘까...

이러다 나는 어떤 대학이든 붙기나 할까?...


왜 이렇게 용기가 없을까.

아니, 차라리 객기라도 부려볼까?


그러다 엉뚱한 상상을 했다.

나는 그 아이가 다니는 대학 캠퍼스를 건들거리며 걷다가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난다. 그런데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안녕" 하고 지나쳐 버린다. 도도하게.

아니다. 조그만 그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캠퍼스 안을 오래도록 원 없이 걷고 싶다.....

상상한 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밤. 세상을 쓸어버릴 듯 매섭게 퍼붓던 소나기가 등굣길 아침이 되자 신기하게도 뚝 그쳤다.

쾌청한 하늘, 개나리 꽃잎에 알알이 맺힌 빗방울이 햇살을 받아 노란 후광을 발산하며 눈부시게 빛났다.

그 사이를 휘돌아 온 바람이 콧속을 헤집고 상큼한 풀 내음을 전했다.


개나리의 찬란한 후광 때문일까. 상큼한 풀 내음을 실어온 바람 덕분일까. 오늘 아침은 정신이 번쩍 들만큼 유난히 맑았다.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걸음을 재촉했다.


'그 아이의 뒤를 따라붙어야 한다.'

'오늘만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심한 것을 꼭 실행해야지.'


마침 슬래브집 대문이 열리고 그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숨이 멈는 듯했다. 늘 그렇듯 그 아이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곧장 언덕을 향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눈치채지 않도록 숨소리를 죽이며 1 미터 간격을 유지한 채 그 아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아이가 든 책가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 멀다. 조금만 더 가까이...'


마침내 팔을 뻗으면 그 아이 책가방의 작은 구멍 속으로 쪽지를 밀어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슴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정신은 아득히 흔들렸다. 혹여 그 아이의 등뒤에서 참아온 숨을 토하는 순간 괴성이 뒤섞여 터져 나올까 두려워 조마조마했다.


'이제 결단을 내리자!'


나는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어 쪽지를 찾았다. 따뜻하게 데워진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와닿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살포시 움켜쥐었다. 자연스레 주먹이 쥐어졌다. 천천히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려는 순간.

아뿔싸!

주먹이 주머니 속에서 걸려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주머니 속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쪽지를 놓으면 손이 자유롭지만, 쪽지를 움켜쥔 채로는 그 속에서 영원히 갇혀버릴 것 같았다.


이 시도는 단번에 끝내야 한다. 망설이는 순간 실패다. 단순한 실패라면 다시 기회가 오겠지만, 만약 그 아이가 이 모든 걸 눈치채 버린다면? 그땐 끝이다. 두 번 다시 그 아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민망하고 수치스러워 몸서리가 쳐졌다.

허둥거렸다.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에잇! 이놈의 쪽지 새끼가...."


쪽지를 쥔 주먹을 주머니에서 억지로 뺐다. '투둑' 호주머니 실밥이 터지는 소리가 났고, 안에서 죽어라 버티던 주먹이 쏙 빠져나왔다. 내가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면서 내뱉은 "에잇!" 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니면 "투둑"하고 주머니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을까? 그 순간 그 아이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덩달아 나도 발걸음을 멈췄다. 하마터면 내 가슴이 그 아이의 등을 떠밀 뻔했다. 그 반동으로 내 머리와 쪽지를 쥔 오른손이 몸보다 앞으로 튀어나왔다. "어멋!" 그 아이가 놀라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여 그 아이의 시선을 피했다. 쪽지를 쥔 내 오른손을 얼른 등뒤로 숨겼다. 어색한 자세로 정지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발등을 누르던 그 아이이의 그림자가 빠르게 앞으로 멀어졌다. 아마 그 아이는 다시 언덕을 향해 비탈길을 오르는 듯했다. 나는 한참 동안 더 그렇게 꼼짝하지 않았다. 창피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그 아이는 이미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었다.


맥이 풀렸다.

재차 시도할 용기도 나지 않았지만, 그러기엔 그 아이는 이미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가 버렸다.


'아~ 이대로 포기하고 마는구나....'


그제야 땀에 젖은 쪽지가 내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에이 씨"

나는 쪽지를 꾸기고 찢어서 허공에 던졌다. 갈기갈기 찢긴 종이조각들이 바람에 실려 길바닥이며 개나리 덤불 속으로 흩어졌다.


터벅터벅 언덕을 올라와 보니, 그 아인 보이지 않고 버스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벌써 탔겠지...'

괜히 미웠다.

나는 괜한 버스를 외면했다.

그러자 외면당한 버스가 휑하니 떠나갔다.

혼자 남았다.

울고 싶어졌다.

학교도 가기 싫어졌다.

선도부들이 험상궂게 희죽거리는 모습도 꼴배기가 싫었다.



나는 그 후로도 한두 번 더 쓰라린 실패를 저지른 거 같다.

그렇게 또 덧없이 2년이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