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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부각 Aug 25. 2021

컬러풀하게 명동 걷기

산책에 색을 더하는 거리의 조형 예술

오랜만에 명동을 걸었다. 지하철역 3 출구로 나와 5분만 걸으면 나오는 남산 가는 . 그런데   전과는 풍경이 다르다. 귀여운 벽화와 조형물이 곳곳에 보인다. 오래된 건물 옥상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만화 캐릭터도 있다. 예술 작품들이 흩뿌려진 길을 걸으니 산책에 알록달록 색깔이 더해진다.


오래된 골목에 색을 칠하는 

처음 상경했을 때 몇 달간은 시내 곳곳을 산책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 중 기분에 따라 산책로를 정해 무작정 걸었다. 우울하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땐 한강을, 사람들 사이에서 활기를 느끼고 싶을 땐 경의선 숲길을 찾았다. 그리고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자주 찾았던 곳은 청계천 광장이다.


이유는 커다란 아이스크림 콘이 있어서다. 광화문에서 시청 가는 길에 동아일보사를 지나면 뾰족하고 높게 솟은 알록달록한 조형물이 보인다. 고즈넉한 광화문 일대를 걷다가 그곳만 지나면 다른 도시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나도 얼른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야지’ 생각하게 만드는 곳. 그런 설렘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 한참 동안 여행하는 상상으로 행복했다.


생각해보면 미술관의 전시를 보고 느꼈던 감정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 단지 작품이 거리에 놓여있었을 뿐. 도시 곳곳에 흩뿌려진 조형물들은 그때 내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잘 만들어진 거리의 조형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간을 새롭게 보게 하고 여행하는 기분까지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명동은 서울 도심에서도 오래된 동네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동거리 방향이 아니라 남산 방향으로 걸으면 종로나 을지로처럼 옛 골목이 나온다. 길 반대편에 비해 작은 사무실과 오래된 식당이 남산자락까지 자리를 잡고 있다. 언뜻 낙후된 지역으로 보이는 동네가 귀여운 캐릭터로 채워졌다. 걸으면 걸을수록 애니메이션이나 웹툰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다.


오래된 동네를 재생시키는 데에 흔히 사용되는 것이 벽화다. 단기간에 거리를 깔끔하게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벽화가 단순히 거리를 정비하는 것에서 나아가 콘텐츠로서 소비될 수 있으려면 동네와의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조금 더 걷다 명동에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전 만화영화부터 최근 사랑받는 웹툰까지 벽화로 채워진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미술 봉사자들과 벽에 색을 칠하고 작은 조형물을 설치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마을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도시의 톤을 바꾸는 예술

미술관에 가면 예술이 어렵고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다가가기 쉽지 않은 작품도 많다. 반면,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예술이다. 설치 미술을 통해 도시 속으로 들여오니 더 가깝고 친근하다. 실제 주민들의 생활감이 느껴지는 거리에 만화가 스며드니 동화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길 하나 건넜을 뿐인데 도시의 톤이 바뀌었다.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보행자 입장에서는 그의 세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눈을 뜨고, 일어나고, 먹고, 걷고, 이야기하고, 일하고, 쉬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매 순간 결정하는 각각의 행위들은 하나의 이벤트가 되어 그 사람의 삶 혹은 세상을 결정한다. '어느 길을 걸어갈 것이고, 친구를 만날 때 어떤 카페에 들어갈 것인가'와 같은 의사 결정이 모여서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의  '그날의 세상'이 구성되는 것이다.”

-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유현준 교수의 책을 읽으며 왜 화려하게 꾸민 관광지 거리보다 사람 냄새나는 골목길에 더 마음이 가는지 알았다. 도장집 지붕에 앉은 강아지 캐릭터나 동네 밥집 옥상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둘리처럼. 익숙한 캐릭터를 보면 스토리를 상상하게 된다. ‘둘리는 왜 지붕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가게의 단골손님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만화 캐릭터가 도시에 스며드는 만큼이나 그곳 사람들의 삶이 조형물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골목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가 아닌 몇 달, 몇 년을 이 동네에서 보내는 사람들의 삶도 그만큼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거리의 만화 캐릭터들이 동화 같은 시간을 선사하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무색무취의 동네를 걸을 때 보다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된다는 사실. 이것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도시의 조형예술이 줄 수 있는 가치인지도 모른다.


남산 자락까지 올랐다 한 바퀴 돌아 다시 명동역으로 내려왔다. 높은 상가 건물과 옷가게가 줄지은 명동거리로 오니 모노 필터가 씌워진 듯 흑백의 도시가 나타났다. 벽화와 조형물이 도시에 색감을 불어넣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만화 캐릭터들이 도시의 톤을 바꾼 것이다. 남산 밑 명동 골목은 더 이상 오래되고 낙후된 동네가 아니다. 예술 작품과 거리의 간판, 만화와 애니메이션 관련 시설들이 한데 어우러져 상상의 범위를 넓혀 주는 산책로다. 힙한 카페와 상가가 들어서지 않아도 명동은 충분히 위트 있는 동네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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