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즈벨트, 히틀러, 스즈키 간타로의 4월
지금으로부터 75년 전,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군에 무조건항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인지 흔히 미국과 독일의 전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1944년 6월에 미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기 전까지 3년 동안 유럽전선에서 독일과 싸웠던 것은 소련이었다. 물론 프랑스의 드골 등 유럽 각지의 레지스탕스가 있었지만, 소련이 아니었다면 유럽은 진작에 히틀러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1945년 3월에 라인강을 건넌 미군은 4월에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만났지만, 결과적으로 베를린을 함락시킨 것은 소련군이었다.(참고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역시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독일 내의 다하우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어 방공호로 피신한 히틀러는 4월 30일, 애인이었던 에바 브라운과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독일이 연합군에 무조건항복한 것이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부터 꼬박 5년 8개월 만에 유럽전선의 전쟁은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 역시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제 남은 것은 아시아의 일본 뿐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네 번째로 맞이한 정월부터 이미 일본은 패색이 짙었다. 1월 9일, 미군은 루손 섬에 상륙했다. "I shall return"이라는 말을 남기고 필리핀에서 호주로 철수해야 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3년 만에 마닐라로 돌아왔다.
2월 4일에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만나 전후처리를 논의했다. 미국은 소련이 아시아 전선에 참전해 일본과 싸워주기를 요청했고,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면 2,3개월 후에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기로 비밀리에 약속했다.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얻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참전은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비극을 낳는다.
미군이 오키나와 본도에 상륙한 4월 초, 일본의 총리였던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国昭) 내각이 총사퇴했다. 소련이 일소 중립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4월 5일의 일이다. 1941년 4월에 성립된 일소 중립조약은 5년 기한이었기에 연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1946년까지는 유효했다, 따라서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은 불법이라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장 거부를 통보받았을 때, 이미 일본 정부는 소련이 언제 참전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일본은 소련을 통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했다.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1882-1950) 등은 소련보다는 직접 미국을 상대로 교섭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조건항복을 의미하는 미국과의 교섭은 육군의 반발을 부를 것이 우려되었다. 소련의 참전을 막는 의미에서도 일본은 소련을 통한 종전을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고이소의 후임 총리로 이름이 오른 인물은 해군 대장 출신으로 당시 추밀원 의장이었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1868-1947)였다. 스즈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고사했다.
군인이 정치에 나서는 것은 국가를 망치는 일이라 생각한다. 로마제국의 멸망, 독일 카이저의 말로,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모두 그렇다. 따라서 내가 정치의 세계에 나서는 것은 내 신념상 곤란한 사정이 있다. 게다가 나는 가는귀가 멀어서 고사하고 싶다.[2]
주변의 거듭된 권유로 천황 히로히토를 만난 스즈키는 "정치 경험이 없어도 된다. 귀가 안 들려도 된다"[3]는 말을 듣고 결국 총리직을 수락한다. 히로히토는 한때 자신의 시종장이었던 스즈키를 아꼈다.
히로히토와 스즈키의 각별한 사이는 이러한 일화가 있다. 1936년, 2월 26일 천황제에 경도된 육군 장교들은 천황 주변의 간신들을 숙청하고 천황으로 중심으로 일본을 바로세우겠다며 쿠데타 미수 사건이 벌어진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을 잇는 쇼와유신('쇼와'는 당시의 연호)을 자처한 이 2.26사건을 모델로 하여 박정희가 1972년에 유신쿠데타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쿠데타군의 숙청 목록에는 시종장이었던 스즈키의 이름도 있었다. 자택을 급습한 군인들에 의해 스즈키는 세 발의 총탄을 맞는다. 대위 안도 데루조가 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하자, 스즈키의 아내가 "노인한테 그만둬 주세요"라고 애원했다. 마음이 약해진 대위는 칼을 거두고 "개인적 원한은 없습니다. 국가개조를 위한 일이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스즈키를 비롯한 중신들의 습격에 분노한 히로히토는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한다. 만약 이때 스즈키가 죽었다면 그 뒤의 일본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스즈키 간타로가 9년 뒤인 1945년 4월 7일, 42대 총리로 취임한 것이다. 당시 77세, 최고령 총리이자 에도시대에 태어난 마지막 총리였다.
히로히토가 스즈키를 총리로 앉힌 것은 단순히 개인적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육군 출신인 도조 히데키와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 시기, 군부는 전쟁을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굽히지 않았다. 패색이 짙어진 1945년에 이르러서도 군부, 특히 육군은 본토결전을 주장했다. 해군 출신인 스즈키가 군부의 반발을 억누르며 전쟁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며칠 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뜻하지 않게 지도자의 교체가 이뤄졌다. 4월 12일 조지아 웜 스프링즈의 별장에서 요양 중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창설을 위해 동분서주한 UN 설립총회가 있기 2주 전이었다. 그가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었던 설립총회에는 부인 엘리너 루즈벨트가 대신 참석하게 된다.
1932년 대공황 직후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위기 속에서 4선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고혈압에 시달리던 그는 네 번째로 출마한 1944년에는 이미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4]
루즈벨트가 사망한 당일,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람은 부통령 해리 트루먼이었다. 트루먼은 대통령직을 승계할 때까지 원자폭탄 개발 계획과 얄타 밀약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만약 백악관에서 얄타 밀약에 대한 문서를 찾지 못했다면 트루먼은 영국에 "얄타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었죠?"라고 물을 뻔했다. [5] "내 몸은 내가 잘 안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자신이 얼마 뒤 사망하고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루즈벨트의 사망과 트루먼의 취임으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소련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냉전으로 흘러가게 된다.
소식을 접한 스즈키는 루즈벨트의 죽음에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 조의 표명은 일본 국내에는 비밀리에 해외용 라디오에서만 이루어졌다.[6] 즉, 전쟁을 끝내기 위한 일종의 외교적 노력이었다 할 수 있다.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등이 스즈키의 조의 표명을 보도했고, 미국에 망명 중이던 토마스 만은 일본의 조의 표명을 "기사도 정신"이라며 추켜세웠다.[7] 토마스 만이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은 루즈벨트의 죽음에 대해 비난과 저주의 말을 퍼부은 나치스와의 대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미국과의 전쟁 종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히틀러가 방공호에서 자살한 것은 루즈벨트가 죽고 18일이 지난 뒤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1933)에 한 달 간격으로 독일 수상과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히틀러는 1월 30일, 루즈벨트는 3월 4일) 두 사람은 같은 해 같은 달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물론, 역사적 평가 역시 정반대였다.
[1] 迫水久常(2015[1973])『大日本帝国最後の四か月:終戦内閣″懐刀″の証言』河出書房新社、p.25.
[2] 위의 책, p.48.
[3] 위의 책, p.52.
[4] 仲晃(2010)『アメリカ大統領が死んだ日』岩波書店、p.11.
[5] 위의 책, p.336.
[6] 위의 책, p.276.
[7] 위의 책, 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