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에서 승리를 이어가던 미국은 필리핀까지 수복하며 그야말로 일본의 턱 밑까지 다다랐다.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 대한 폭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1945년 3월 26일 오키나와의 남쪽에 위치한 게라마(慶良間) 열도에 미군이 상륙하면서 이후 3개월 동안 이어진 오키나와전이 시작된다. 당시 일본은 적의 포로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자결하도록 교육했다. 게라마 열도에서는 주민 700여 명이 집단 자살했다. 이후 주민들의 집단자살은 오키나와 전역에서 벌어지게 된다.
4월 1일, 미군은 오키나와섬 중서부에 상륙한다. 미군의 예상과 달리 상륙작전 자체는 용이하게 이루어졌고, 종군기자는 "피크닉"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1]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32군은 원래 3개 사단으로 미군의 상륙 자체를 저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1944년 11월, 타이완으로 1개 사단이 전출되면서 상륙을 저지하는 대신 지구전을 펼치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2] 지구전으로 인해 희생된 일반주민의 수는 9만 4천 명에 다다랐고, 군대에 있던 주민까지 포함하면 당시 60만 명이던 오키나와 주민 중 4분의1 가까이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정작 미군은 필리핀을 탈환한 이후, 타이완을 건너뛰고 곧장 오키나와로 진격했다.
원군으로 오키나와를 향하던 전함 야마토(大和)는 4월 7일, 미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다. 전장 263m, 전폭 39m, 기준 배수량 64만 톤의 야마토는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전함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무의미한 작전으로 인해 야마토는 오키나와로부터 300km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오키나와의 일본군은 미군에 밀리며 퇴각에 퇴각을 거듭하며 오키나와 섬의 북부를 잃었다. 5월 중순, 일본군은 오키나와 섬 중부에 위치한 슈리(首里)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일방적 승리를 거듭하던 미군에서 2천 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의 치열한 전투였다.[3]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32군 사령부에서는 이대로 슈리에서 전멸할 때까지 싸울 것인가, 남부로 퇴각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오키나와현의 지사 시마다 아키라(島田叡)는 일본군이 슈리에서 전멸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부로 후퇴하면 오키나와 주민의 피해가 확대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4] 하지만 일본군은 오키나와 섬 남단의 마부니(摩文仁)로 퇴각하기로 결정했고, 오키나와전은 이후로 한 달 더 계속된다. 결국 6월 23일,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満)가 자살하면서 조직적 전투는 종결되었다. 하지만 우시지마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라고 명했기에, 오키나와 각지의 산발적 전투는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난 뒤인 9월 7일까지도 계속되었다.[5]
당시의 현지사는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이었다. 고베에서 태어나 오사카에 살고 있던 시마다 아키라가 별다른 연고도 없던 오키나와 현지사로 임명된 것은 1945년 1월 12일이었다. 전임 지사는 1944년 12월 도쿄로 출장을 갔다가 오키나와로 돌아가지 않은 채, 가가와현의 지사로 부임했다. 전운이 감돌던 오키나와로 시마다에 도착한 것은 1월 31일이었다. 주민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 시마다는 주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전투가 시작되고 난 뒤에 일본군과 함께 남부로 퇴각한 시마다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아마도 6월 말에서 7월 초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중엽까지 청나라와 일본의 사쓰마(薩摩) 번에 조공을 바치던 류큐(琉球) 왕국이 일본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은 1872년의 일이다. 일단은 류큐번으로 편입된 이후, 1879년 류큐왕국이 멸망하고 오키나와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류큐왕국의 왕궁이었던 슈리성은 1945년에 불탔다. 1990년대에 재건된 슈리성은 2019년 화재로 전소된다.
1945년 당시의 오키나와는 일본으로 편입된 지 7,80년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오키나와에서 미국과의 전투를 준비하던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이 미국과 내통하지는 않을까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우치나구치"라고 불리는 오키나와의 방언은 일본 표준어와는 큰 차이가 있어 거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일본은 이전부터 오키나와 방언을 금지하고 표준어를 강제하고 있었는데, 오키나와전이 가까워지자 오키나와 방언을 사용하면 스파이로 간주하고 처형하게 된다.[6] 오키나와로 끌려온 조선인 노무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조선어로 대화하면 스파이로 물렸다.
오키나와를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을 지연시키는 시간 끌기 정도로 여겼고 결과적으로 오키나와전에서 민간인 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의 해군 사령관이었던 오타 미노루(大田實) 소장은 자결하기 6일 전인 6월 7일 해군 차관에게 오키나와 주민들의 열악한 상황과 헌신적인 전투를 묘사하는 전보를 보냈다. 전보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초토화되려 한다. 식량은 6월을 겨우 견뎌낼 정도라고 한다. 오키나와 주민은 그렇게 싸웠다. 주민에 대해 후세에 특별한 배려를 부탁한다.(一木一草焦土ト化セン 糧食六月一杯ヲ支フルノミナリト謂フ 沖縄県民斯ク戦ヘリ 県民二対シ後世特別ノ御高配ヲ賜ランコトヲ)[7]
오타가 부탁한 "후세의 특별한 배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통치하에 있던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된 것은 1972년, 일본 본토가 연합군의 점령으로부터 벗어나고 나서 20년이 지난 뒤였다. 일본으로 반환된 뒤에도 오키나와는 주일미군 기지로 이용되었다. 일본 국토의 0.6% 면적에 불과한 오키나와현에는 일본 내의 미군 전용시설 74%(자위대 겸용시설까지 포함할 경우 미군기지의 23%)가 위치해 있다[8]. 그리고 오키나와는 경제적으로도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다.
19세기 후반의 류큐왕국 병합부터 태평양전쟁 중의 오키나와전, 27년이나 계속된 미군점령기, 그리고 일본 복귀 후에도 계속된 미군기지.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는 오키나와를 피해자로 묘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일방적 피해자의 관점에 대해 류큐대학 교수 오세종은 오키나와전 당시의 조선인에 대한 연구를 했다.
1944년 8월 무렵부터 조선인 노무자들이 오키나와로 동원돼 굶주림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또한 일본 본토에는 위안소가 설치되지 않았는데, 오키나와에만은 현지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위안소가 설치되었다.[9] 오키나와에 주둔한 32군은 그 전에는 중일전쟁 당시의 중국에서 전투를 했었기에 오키나와 현지인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인 노무자나 위안부를 직접적으로 학대한 것은 일본군이었지만, 오키나와 주민들 역시 때로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행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난 8월 20일, 오키나와 섬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쿠메(久米)섬에서는 조선인 구중회(具仲會)와 부인, 다섯 자녀 등 일가족이 스파이로 몰려 살해당한 사건도 벌어졌다. 오세종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측면에서 '일본군=가해자, 오키나와 주민=피해자'라는 기존의 서사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10]
오키나와의 전투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끝날 때까지도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본토결전"을 주장하고 있었다. 미국은 1945년 11월에 규슈로 상륙해 전투를 벌이는 "올림픽 작전"을 세우는 한편, 원자폭탄 투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 역시 얄타 밀약에서 결정된 대로 유럽 전선의 전투가 끝난 뒤, 일본과의 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玉木研二(2005)『ドキュメント沖縄1945』藤原書店, p.15.
[2]田村洋三(2006[2003])『沖縄の島守:内務官僚かく戦えり』中央公論新社, pp.132-133.
[3]玉木研二(2005)『ドキュメント沖縄1945』藤原書店, p.98.
[4]田村洋三(2006[2003])『沖縄の島守:内務官僚かく戦えり』中央公論新社, p.354.
[5]呉世宗(2019)『沖縄と朝鮮のはざまで:朝鮮人の<可視化/不可視化>をめぐる歴史と語り』明石書店, p.85.
[6]大田昌秀「軍隊との「共死」の道連れにされた住民」『記録・沖縄「集団自決裁判」岩波書店, p.165.
[7]田村洋三(2006[2003])『沖縄の島守:内務官僚かく戦えり』中央公論新社, p.426.
[8]大久保潤、篠原章(2015)『沖縄の不都合な真実』新潮社, p.71.
[9]呉世宗(2019)『沖縄と朝鮮のはざまで:朝鮮人の<可視化/不可視化>をめぐる歴史と語り』明石書店, p.69.
[10]위의 책, p.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