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1945년 11월에는 규슈에 상륙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올림픽 작전이다. 일본 역시 본토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전쟁에서 이길 가망은 없었지만, 본토결전에서 일격을 가한 뒤,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한다는 것이 일본의 목표였다.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육군대신이었던 아나미 고레치카는 "화평 알선을 의뢰하기 전에 한 번 적의 본토 상륙 기회를 타고 일격을 가한 뒤,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끝나고 싶다"[1]고 말했다.
물론 이러한 본토결전 준비는 희망회로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의 항복, 오키나와전의 패배, 식량과 물자 부족 등등의 악재밖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5월 25일에는 폭격으로 황궁의 일부가 불탔다[2]. 히로히토의 심중은 점점 일격을 가해서 유리한 국면을 만든 뒤 전쟁을 끝나는 대신 항복을 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오키나와전이 끝나기 전날인 6월 22일,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수상과 외상, 육해군 대신을 앞에 두고 천황 히로히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토결전에 대해 만전의 준비를 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로 전쟁의 종결에 대해 이참에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속히 구체적 연구를 해서 실현을 위해 노력하도록 희망한다."[3]
사실상 본토결전 대신 외교를 통한 항복을 해결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스즈키 간타로 내각과 외무성은 협상을 위한 노력에 나서기는 했다. 하지만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4월에 불가침 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소련에 의한 중개에 매달리고 있었다. 얄타 회담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을 약속했던 소련과의 교섭이 성과를 거둘 리가 만무했고, 결국 한 달여의 골든타임은 지나갔다.
부시 정권의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바이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부통령은 대통령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고.
임기를 마치지 못한 대통령의 자리를 부통령이 물려받는 일은 종종 있었다. 20세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 케네디의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 등이 떠오른다. 재선에도 성공한 트루먼과 존슨은 전임자인 루스벨트와 케네디의 그림자에 가려져 업적이 과소평가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구축한 인물은 트루먼이었고, 공민권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흑인 차별을 철폐하는 데 공헌한 인물은 존슨이었다.
순전히 '운빨'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 트루먼이지만 청년 시절까지의 운수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남부 미주리주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해리 트루먼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농장 일을 비롯한 갖가지 직업을 전전했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20대를 허송세월하고 결혼도 못하던 그가 활로를 찾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이었다. 당시 33세였던 그는 징집 대상 연령을 지났음에도 지원했고, 눈이 나빴지만 시력검사표를 암기해서 군에 입대한다. 유럽 전선에서 대위로까지 승진하고 제대한 그는 미국에 돌아와 1919년, 여섯 살 때부터 소꿉친구였던 베스와 결혼식을 치른다. 훗날, 베스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 산 대통령 부인으로 기록된다.
이후로 또 한 차례 사업에 실패한 트루먼에게 전기가 찾아온 것은 1922년, 잭슨군(Jackson County)의 지방 판사로 선출되면서부터다. 최종학력이 고졸이었고 법이나 정치를 공부한 적도 없었던 트루먼이 판사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미주리의 무솔리니"[4]라는 별명을 가진 지방 유지, 토마스 펜더개스트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의 지방에서는 "죽은 사람조차 투표시킨다"[5]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했고, 지방 유지였던 펜더개스트의 힘으로 무명의 트루먼이 지방 판사가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트루먼이 캔자스 시티 법률학교에 다니며 법을 공부하는 것은 판사로 당선된 이후의 일이다[6].
펜더개스트의 지원을 받아 트루먼은 지방 판사직을 수행했지만,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은 아니었다. 펜더개스트조차도 트루먼을 상원의원 '깜'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934년 상원의원 선거 당시, 트루먼을 후보로 내세우면 어떻겠냐는 측근의 제안에 "지명도가 전혀 없어. 그는 평범한 군 판사야. 잭슨군 밖에서는 무명이야"[7]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하지만 펜더개스트는 결국 트루먼을 상원의원 후보로 세우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주리 주의 양대 도시는 캔자스 시티와 세인트루이스였고 두 지역은 일종의 경쟁 관계에 있었다. 펜더게스트의 기반은 캔자스 시티였는데, 미주리 주의 상원의원 두 자리를 세인트루이스가 독식하는 꼴은 막고 싶었고, 캔자스 시티 일부를 포함한 잭슨 군의 판사 트루먼 외에 마땅한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선거전 중에 <뉴욕 타임스>가 "무명의 트루먼이 가진 유일한 강점은 캔자스 시티의 펜더개스트의 힘뿐이다"[8]라고 평가할 정도였던 트루먼은 우여곡절 끝에 1934년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당선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전형적인 대기만성이었다.
"펜더개스트의 상원의원"이라며 험담을 들어야 했던 트루먼은 루스벨트 정권의 지지하며 첫 임기 6년을 보냈다. 위기가 닥친 것은 상원의원 재선에 도전한 1940년이었다. 정계 입문 당시부터 트루먼을 지원해 온 펜더개스트가 1939년, 탈세로 형무소에 들어간 것이었다. 펜더개스트의 힘으로 상원의원이 된 트루먼의 운빨도 여기까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펜더개스트의 도움 없이 치른 민주당 경선에서 트루먼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다. 미주리 주는 당시만 해도 경선이 곧 본선일 정도로 민주당의 텃밭이었고, 트루먼은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한다. 동시에 치러진 대선에서 루스벨트 역시 전대미문의 3선에 성공했다. 물론 이 시점에서 평범한 상원의원 트루먼이 4년 뒤, 루스벨트의 부통령이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신히 재선에 성공한 트루먼은 물론, 그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하게 될 루스벨트조차도.
트루먼은 1941년부터 국방위원회에서 군납비리를 조사하면서 지명도를 올렸지만, 1944년 부통령 후보로 그의 이름이 올랐을 때, 루스벨트는 "난 그 친구를 잘 몰라"[9]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될 수 있었던 것은 무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 정권에서 민주당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기존의 텃밭이었던 남부에 더해 노동자, 흑인, 진보파를 아우르는 뉴딜연합이 형성되었다. 트루먼이 부통령으로 발탁된 이유는 여러 지지세력들 중 특정 집단이 적극적으로 싫어하지 않는 소거법에 의해서였다.
1945년 1월, 루스벨트의 4선 임기와 함께 트루먼의 부통령으로서의 임기도 시작되었지만, 루스벨트는 그를 진정한 동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트루먼에게 원폭 개발과 얄타 밀약 같은 중대한 사항에 대해서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에게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진행된 포츠담 회담은 외교적 데뷔 무대였다. 베를린 남서쪽 25km에 위치한 포츠담은 원래 호엔촐레른 왕조의 여름 별궁으로 이용되던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트루먼은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 결코 밀리지 않는 실력을 보였다.
냉전의 시작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포츠담 회담에서 논의된 주제는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비롯해 다양했지만, 일본에 관해서는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회담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은 중국까지 포함해 미영중 서명으로 발표되었지만, 소련은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일본은 마지막까지 소련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포츠담 선언에 대해 주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나쁘지 않다고 다. 그때까지 연합국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던 것과 달리 8개의 조건으로 특정되었고, 독일에 대한 점령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 조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고는 여전히 소련을 통한 강화를 모색했다.
일본이 가장 중요시했던 문제는 국체호지(國體護持), 즉 천황제의 유지였다. 주화파는 천황제 유지를 강화를 위한 유일한 조건으로 내건 반면, 육군을 필두로 한 강경파는 거기에 더해 연합국에 의한 직접 점령 대신 일본 정부의 간접 점령, 무장해제와 전범 심판은 자주적으로 하겠다는 세 조건을 주장했다. 육군의 폭주를 두려워한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이라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미국 수뇌부에서는 일본 점령 후에도 천황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 있었지만, 포츠담 선언에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미국 국내 여론과 다른 연합국들을 생각하면 공식적으로 선언할 수는 없었다. 1945년 6월 29일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70%가 천황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었다[10]. 루즈벨트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여론을 무시할 만한 정치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은 몰라도 다른 연합국, 특히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 영국과 중국은 천황제를 용인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던 상태였다는 점 또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11].
7월 28일, 기자회견에서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포츠담 선언에 대해 "우리는 어디까지나 전쟁 완수에 매진할 뿐이다"[12]라고 대답했고, 이튿날 신문에는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13]는 총리의 발언이 대서특필되었다.
결국 일본은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 이전에 전쟁을 끝낼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만약 이때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면 직접적으로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수십만 명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간접적으로는 한반도의 분단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鈴木多聞(2011)『「終戦」の政治史1943-1945』東京大学出版会, p.127.
[2]앞의 책, p.125.
[3]迫水久常(2015[1973])『大日本帝国最後の四か月:終戦内閣″懐刀″の証言』河出書房新社、p.13.
[4Baime, A.J.(河内隆弥)(2018)『まさかの大統領:ハリー・S・トルーマンと世界を変えた四カ月』国書刊行会、p.112.
[5]앞의 책, p.104.
[6]앞의 책, p.105.
[7]앞의 책, p.113.
[8]앞의 책, p.117.
[9]앞의 책, p.149.
[10]三浦俊彦(2008)『戦争論理学:あの原爆投下を考える62問』二見書房, p.129.
[11]앞의 책, p.109.
[12]角田房子(2015)『一死、多罪を謝す 陸軍大臣阿南惟幾』筑摩書房, p.279.
[13]앞의 책, p.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