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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Feb 22. 2021

4.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7월 30일,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가 일본군 잠수함의 어뢰에 격침 당해, 1196명 중 880명이 사망했다[1]. 인디애나폴리스는 티니언 섬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와 팻 맨을 내려놓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일주일 뒤인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티니언에서 출격한 폭격기가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를 투하한다. 그로부터 사흘 뒤에는 팻 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원자폭탄에 대해서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에 대한 이야기부터 할 필요가 있겠다. 주기율표에서 우라늄의 원소번호는 92. 우라늄의 특징은 방사능을 띄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핵분열하기 쉬운 동위원소가 있다는 것이다. 천연 우라늄의 99%는 우라늄 238인데, 0.7%는 방사성 동위원소 우라늄 235다. 원자량이 238인 우라늄 238에 비해 우라늄 235는 중성자가 세 개 부족하다. 그래서 핵이 불안정한데, 일정한 조건에서 핵분열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핵이 분열하면서 다른 원소로 분해되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량의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 에너지를 무기로 이용한 것이 원자폭탄, 발전용으로 이용한 것이 원전이다.


원소번호가 94인 플루토늄은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공 원소다. 임계 반응을 일으키기가 우라늄보다 쉽기에 히로시마 이후의 원자폭탄은 플루토늄을 사용하고 있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은 플루토늄을 사용한 폭탄이다.


리틀 보이와 팻 맨은 외관부터 큰 차이가 있다. 리틀 보이는 길쭉하고 팻 맨은 둥글다. 그 이유는 임계를 일으키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인데, 리틀 보이는 폭탄 내에서 총알을 발사시켜서 반으로 쪼개진 우라늄을 반응시키는 총신(Gun barrel)형이다. 이 방식은 플루토늄 폭탄에는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팻 맨은 구체 안의 플루토늄에 균일한 압력을 가해서 핵분열을 이끌어내는 내파(Implosion)형을 채용했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의 주요 도시 중 그때까지 폭격의 피해가 없었던 도시가 후보지로 올랐다. 그중 전통 사찰과 문화재가 많다는 이유로 교토가 후보지에서 제외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팻 맨이 투하될 예정이었던 규슈의 고쿠라(小倉)는 8월 9일 오전 구름이 껴서 시계가 좋지 않아서 원폭을 피하게 되었다. 그 대신 원폭의 피해를 입은 곳이 나가사키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로 사망한 사람은 약 2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에서는 원폭 투하가 태평양전쟁을 종결시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가설에 대한 반론이 심심찮게 제기된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가 없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일본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8월 8일에 있었던 소련의 참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이 있고 나서 열린 최고 작전회의에서조차 포츠담 선언 수락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3:3으로 팽팽했고, 8월 15일에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반대하는 육군 강경파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하물며 원폭 투하가 없었더라면 일본의 항복이 더 늦어졌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름 아닌 천황의 종전 조서가 "적이 새롭게 만든 잔학한 폭탄"을 항복의 이유로 들고 있으며, 주화파였던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米内光政)는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을 "천우(天祐)"라고 말했다[1]. 참고로 당시 해군 전력은 대부분 괴멸된 상태였고, 본토결전이 시작되면 해군은 육군의 지휘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어쨌든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이 일본 항복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미군이 규슈에 상륙하는 몰락 작전이 실제로 전개되고,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한 지상전이 벌어졌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보다 더 큰 피해가 벌어졌을 것이다. 오키나와와 사할린, 만주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지상전을 생각하면, 일본의 항복이 한두 달이라도 더 늦어졌을 때 벌어졌을 참상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정의라고 여기는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정당화될 것이다. 즉 원폭 투하는 트롤리 열차를 그대로 달리게 만들어 5명의 희생자를 내는 대신 선로를 틀어 1명을 희생자를 발생하게 만든 행위였다는 것이 공리주의적 관점이다.



그러나 필자는 공리주의적 발상에 동의하기가 꺼려진다. 가장 큰 이유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희생된 대부분이 민간인이라는 사실이다.


비행기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제2차 세계대전(그 전초전 성격인 스페인 내전과 중일전쟁도 포함해서)에서는 자국 군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군의 군사시설을 공격할 수 있는 폭격이 자주 사용되었다. 게르니카, 충칭, 런던, 드레스덴, 도쿄...... 그리고 그 절정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다. 이렇듯 도시에 대한 전략적 폭격이 만연했기에 일본의 충칭 폭격에 대해서는 도쿄재판에서도 불문에 부쳐졌다.


태평양전쟁 당시 도쿄를 비롯한 일본 본토의 주요 도시를 폭격한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1906-1990)는 "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 그들의 정부고, 우리는 더 이상 무장한 적군뿐 아니라 사람들과 싸운다. 그래서 소위 죄 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데에 죄책감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4]고 말했다고 전해진다(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훗날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는다). 하지만 전시에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살상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민간인에 대한 살상이라는 점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정의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은 일본 정부의 책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에 희생된 사람은 일본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닌 실재하는 개인들이었다. 히로시마에 군항 등 군사시설이 있었다고는 해도,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간인이었다. "어쨌든 그들의 정부"라는 르메이의 논리에 따르더라도 전쟁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예를 들어 어린이들의 희생까지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시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20세기 전쟁의 몇 가지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군사적 응용, 비행기의 발달로 인해 가능해진 도시 자체에 대한 공중에서의 무차별 공격, 민간인이 전쟁에 동원된 총력전. 여기에 천황제 유지를 위해 무조건 항복을 망설인 일본 정부와 지상전으로 인한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고자 했던 미국 정부의 고려가 더해지면서 인류의 비극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항복은 빨라졌고,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한 지상전은 회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론과는 별개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정당화될 수 없는 비극이며, 우리 모두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 三浦俊彦(2008)『戦争論理学:あの原爆投下を考える62問』二見書房, p.58.

[2] 앞의 책, p.89.

[3] 앞의 책, p.148.

[4]커티스 르메이 - 나무위키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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