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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Aug 16. 2022

6. 8월 15일 이후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일본이 항복하고 태평양전쟁이 끝났다.


흔히 이렇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다. 바로 소련과의 전쟁이다.


1941년 일본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소련은 1945년 4월, 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일본은 마지막까지 소련을 중개해서 전쟁을 끝내려 협상을 시도했지만, 소련은 이미 2월의 얄타 회담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밀약한 상태였다. 7월의 포츠담 선언에도 소련은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에 일본은 희망을 놓지 않고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았다.


소련은 8월 8일 모스크바의 일본 대사에게 선전포고를 통보한다. 그러나 소련은 대사관에서 일본 본국으로의 통신망을 차단했기에 선전포고는 일본에 전해지지 않았다[1]. 8월 9일 자정, 소련군이 만주에 침공을 시작하면서 일소 전쟁이 시작되었다. 소련과의 협상에 희망을 걸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청천벽력이었다. 이 날 오전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일본이 항복을 결정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 지역들은 기본적으로 미국, 중국, 소련에 의해 접수되었다(홍콩은 영국에 의해 접수된다).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 혹은 태평양 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혼란은 있었지만, 특히 소련이 점령한 만주는 약탈과 학살 등으로 악명 높다. 1905년의 러일전쟁, 1920년 러시아 혁명 직후 일본의 시베리아 참전에 대해 소련은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만주는 소련의 점령이 일단락된 뒤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된다. 만주에 주둔 중이던 관동군은 일본군 중에서는 정예 부대였지만, 일본 본토와 각지의 전선으로 주력이 된 병력이 빠져나간 상태였고, 소련군에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소련군과의 전투가 계속되던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이 전해졌고, 8월 18일에는 만주국 황제 부이가 퇴위를 선언하면서 만주국은 해체된다. 소련 점령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 세력을 신장한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만주에서 전쟁이 시작된 지 이틀 뒤인 8월 11일, 사할린에도 소련군이 진격을 시작했다. 사할린의 전쟁은 8월 15일에도 끝나지 않았다. 쿠릴 열도에서는 8월 17일부터 소련군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사할린의 일본인들은 천황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한 다음 날 소련군의 침공을 받는 일도 있었다. 일본군과 소련군이 정전 협정을 맺은 것은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8월 22일이었다. 심지어 소련군은 정전 협정을 맺은 직후에 도요하라(현재의 유즈노사할린스크)를 폭격했다[2]. 


이후로도 소련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미주리 호에서의 항복 문서 서명이 이뤄진 지 사흘이 지난 9월 5일에야 하바마이 군도를 점령하면서 일소 전쟁은 끝나게 된다. 얄타 밀약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차지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진격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소련은 포로가 된 일본군을 소련과 몽골의 수용소로 보내 노역을 시켰다. 약 57만 5000명이 억류되었고, 추위와 굶주림, 고된 노동으로 인해 약 5만 5천 명이 억류 중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3] 길게는 일소 공동선언이 있었던 1956년까지 11년이나 억류되었던 이들도 있다. 역사학자 도미다 다케시는 미국과 서유럽 나라들은 포로를 "열심히 싸운 명예로운 존재"로 보느냐, 일본, 독일, 소련처럼 "죽어야 할 수치스러운 존재"로 보느냐의 차이를 지적한다.[4]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알려져 있듯이, 실제로 일본군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포로로 사로잡은 연합군에게 강제 노역을 시킨 바 있다. 


수용소에서는 소련의 사상 교육도 이뤄졌다. 1949년에는 5만 6천 명의 일본인 포로들이 서명한 <스탈린 대원수에 대한 감사장>은 그러한 사상 교육의 대표적 사례다.[5] 그 때문에 소련에 억류되었다가 일본에 귀국한 포로들은 "빨간 물이 든"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편견과는 달리 실제로 소련에서 귀국한 이들 중 상당수는 보수적인 자민당 지지자였다.


당시 일본 영토였던 사할린 남부에는 조선인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경우 일본인들처럼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소련은 남한으로의 귀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상당수는 사할린에 남게 된다. 이른바 '사할린 잔류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냉전으로 인한 남북 분단, 억압적인 소련 체제에 의한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소련은 홋카이도까지도 점령할 계획을 세웠지만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일본은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을 면하게 되었지만, 그 대신 한반도가 냉전에 의한 분단의 희생양이 되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표명한 8월 10일, 미국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그 아래로까지는 소련이 내려오지 않도록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삼팔선, 남북 분단의 시작이었다.


포츠담 선언에는 일본의 조선 포기가 명시되어 있었다. 8월 15일, 조선 총독부는 정권 이양을 위해 여운형과 접촉했고, 건국준비위원회가 설립된다. 삼팔선 이북의 평양에서는 조만식이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여운형과 조만식 대신 이승만과 김일성을 선택하게 된다.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시게마쓰 마모루와 우메즈가 항복문서에서 서명한 지 일주일 뒤인 9월 9일, 조선 총독부는 항복문서에 조인한다. 소련의 배로 김일성이 원산에 도착한 것은 9월 19일,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한 것은 10월 16일이다. 충칭 임시정부의 김구 일행이 미국의 비행기로 귀국한 것은 그보다 한 달 늦은 11월 23일이다. 이후의 해방 정국과 미군정을 거친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영역이다.


앞서 일본이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 있었던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로 기념하는 이유가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는 설을 소개했다.


5. 포츠담 선언 수락과 항복 (brunch.co.kr)


그런데 이 가설에는 의문이 남는다. 한국에서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일각에서는 8월 15일을 건국절로 기념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국에서 8월 15일이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 역사학자 가토 기요후미는 일본의 9월 2일에 조선의 9월 9일을 대입한다.

8월 15일 이후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던 한국에 9월 9일은 굴욕일 뿐이었다. 그들은 3년 전 이루지 못했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허구 속이라 할지라도 달성하기 위해서 8월 15일이어야 했던 것이다.[6]

흥미로운 해석이긴 하지만, 일본이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로 삼은 이유를 단순히 대입한 것에 그치고 있어 설득력이 강한 것 같지는 않다. 미국에 패배한 일본과 달리 당시 조선인들이 미국에 콤플렉스를 가질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김구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방자로서의 미국을 환영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날 당시, 일본에는 200만 명의 조선인, 조선에는 70만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1945년 8월 이후, 양쪽에 있던 조선인과 일본인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8월 24일에는 조선인 징용공을 태운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시모키타 반도에서 조선으로 향하던 도중, 쓰루마이 항에서 폭침하며 549명(일본인 선원 25명 포함)이 희생되었고, 10월 14일에는 조선에서 일본인을 태운 다마마루(珠丸)가 이키가쓰모토 해안에서 폭침하며 545명의 희생되었다. 두 해난 사고는 도야마루(洞爺丸) 조난(1954년 태풍에 의한 침몰 사고. 사망자, 실종자 1155명)에 버금가는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일본에서는 거의 잊혔다. [7]

훗날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으로 옮겨 가게 될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지만 1945년 8월, 장제스는 타이완의 복귀에 대해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만주와 중국의 일본 점령 지역을 접수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고, 변방의 섬인 타이완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중화민국 군이 타이완을 접수한 것은 두 달여가 지나서였다. 1895년부터 50년간 계속된 일본의 식민 지배가 끝나고 국민당 정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중화민국으로의 복귀를 반기던 타이완인들은 곧 실망하게 된다. 당시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일본이 개였다면, 중화민국은 돼지라는 것이다.


국민당 정부와 현지 타이완인들의 갈등은 1947년 2.28 사태로 비화된다. 현지 타이완인들의 저항을 국민당 정부가 탄압한 사건이다. 1949년에는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옮겨오고, 40여 년간 계속된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의 독재에 대한 내성인(內省人, 1949년 이전부터 거주하던 타이완인을 일컫는 말)들의 반감은 민주화를 거치면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오키나와 역시 일본 본토와는 다른 타임라인으로 전쟁의 끝을 기억하고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조직적 전투가 끝난 날인 6월 23일을 지금도 '위령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후로도 9월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 각지에서 전투가 이어졌다. 도쿄의 미주리호에서 항복 문서 조인이 있고 나서 닷새 뒤인 9월 7일, 오키나와 현지 사령부의 항복 문서 조인이 이뤄졌다.


동시에 미군은 민간인들을 수용소에 수용하는 한편, 미군 기지를 건설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열악했지만, 식량난 속에서 음식을 배급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증언도 있다[8]. 전쟁 당시 오키나와 당국에서는 미군을 흉악하기 짝이 없는 악당들로 선전했다. 그 때문에 많은 민간인들이 항복 대신 집단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뜻밖에 관대한 미군을 해방자로 여긴 민간인들도 있었던 것이다. 


지상전이 있고 나서 본토보다 한 발 앞서 미군의 점령기가 시작된 오키나와는 본토의 점령이 끝나고 나서 20년이 지난 1972년에야 일본으로 반환된다. 1946년 1월 29일, 오키나와를 비롯한 일본 전역을 점령하고 있던 연합군 당국은 북위 30도선을 기준으로 그 이남의 오키나와 일대를 본토로부터 행정적으로 분리한다. 그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 점령이 끝나고 난 뒤에도 오키나와에서는 미국의 통치가 계속된 것이다.


[1] 加藤聖文(2009)『「大日本帝国」崩壊:東アジアの1945年』中央公論新社, pp.26, 27.

[2] 앞의 책, p.211.

[3] 堀内賢志、齋藤大輔、濱野剛편저(2012)『ロシア極東ハンドブック』東洋書店, p.267.

[4] 富田武(2020)『日ソ戦争:1945年8月』みすず書房, p.215.

[5] 富田武(2016)『シベリア抑留:スターリン独裁化「収容所群島」の実像』中央公論新社, p.130.

[6] 加藤聖文(2009)『「大日本帝国」崩壊:東アジアの1945年』中央公論新社, p.99.

[7] 앞의 책, p.82.

[9] 川平成雄(2011)『沖縄空白の一年:一九四五ー一九四六』吉川弘文館,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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