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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Jun 05. 2023

7. 점령기의 개혁

"I shall return(나는 돌아갈 것이다)."


더글라스 맥아더의 명언이다. 1880년, 태어난 장군이었던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필리핀 총독을 역임했고, 더글라스 맥아더 역시 임관한 뒤의 첫 임지가 필리핀이었기에 각별한 장소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육군에 들어간 맥아더는 승승장구를 거듭해 1930년 최연소 육군 참모총장이 되어 5년간 재임했다. 그러나 보수적 성향의 맥아더는 해군 출신에 민주당의 진보적 대통령 루즈벨트와는 껄끄러운 관계였고, 참모총장직을 퇴임한 뒤에는 필리핀에 군사고문으로 갔다[1].


그러던 차에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1942년 1월, 일본에 의해 수도 마닐라가 함락된 후,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탄 반도로 퇴각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영화 <덩케르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지만 선전한 맥아더의 모습이 미국 본국에 전해지면서 그의 큰 전기가 된다. 진주만 이후, 뚜렷한 전과가 없어 우울에 빠져 있던 미국 국민들에게 바탄 반도의 맥아더는 영웅으로 비쳤고,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전쟁 영웅이 된 맥아더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될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는 필리핀에서 호주로 탈출할 것을 명령한다. 1942년 3월 20일, 호주로 탈출한 맥아더가 기자들에게 한 말이 "나는 돌아갈 것이다"라는 명언이었다. 맥아더의 탁월한 쇼맨십이 돋보이는 말이다.


그리고 맥아더는 그 말을 실행에 옮겼다. 이후 반격에 나선 미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승기를 잡았고, 맥아더는 1944년 필리핀을 탈환하게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해군의 니미츠와 육군의 맥아더와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니미츠는 필리핀을 통과하고 타이완을 전장으로 삼으려 했지만, 필리핀에 고집한 맥아더는 타이완을 통과해서 오키나와를 전장으로 삼았다. 결국 둘 중에서 맥아더의 전략이 실현되었다.[2] 그리고 일본이 항복한 뒤의 점령 역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주관하게 된다. 


8월 28일, 미국의 점령군 선발대가 일본에 도착한다. 맥아더가 오키나와를 거쳐 아쓰기 비행장에 상륙한 것은 이틀 뒤인 8월 30일이었다. 여유롭게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혈혈단신 비행기에서 내린 맥아더의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미국의 일본 점령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독일 점령과 달랐다. 하나는 미영프소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동독과 서독으로 분할된 독일과 달리 일본은 사실상 미국에 의한 단독 점령(예외적으로 영국군이 소수 있었다)이었다는 점이다. 소련이 홋카이도 동부의 점령을 요구했지만, 유럽 전선과 달리 태평양과 아시아에서 소련이 참전한 것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기에 막대한 희생을 치른 미국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일본 대신 한반도가 독일처럼 분단의 비극을 겪게 된다. 


또 하나는 직접 점령이 시행된 독일과 달리 일본의 내각과 정부 기구를 통한 간접 점령이었다는 점이다. 단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등은 미국이 직접 통치했고, 이 지역은 일본 본토의 점령이 끝난 1952년 이후에도 미국의 통치가 계속되었다. 오가사와라가 일본에 반환된 건 1968년, 오키나와가 반환된 건 1972년이 되어서다.


10월 12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SCAP, General Headquarters/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가 창설된다. 이후 총사령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까지 일본 정부와 연합군에 지시를 내리며 점령 정책을 주관한다. 그 총사령관이 바로 맥아더였다.


일본의 맥아더는 "푸른 눈의 쇼군(將軍)"이라 불렸다. "쇼군"은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실권을 행사한 권력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미군 계급상으로 장군이었던 맥아더가 일본의 최고 권력자이기도 함을 중의적으로 비유한 표현이었다. 실제로 맥아더는 "나는 일본 국민에게 사실상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했다. 역사상 어떤 식민지 총독, 정복자, 총사령권도 내가 일본 국민에게 행사한 것만큼의 권력은 가진 적이 없을 것이다"[3]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한편 8월 14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뒤,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총사퇴했다. 그 뒤를 이어 황족인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邇稔彦)가 총리가 되었다. 황족이 총리가 된 사례는 히가시쿠니가 유일하다. 그리고 58일간의 재임 기간은 현재까지 최단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러 모로 비상시국의 임시 총리였던 히가시쿠니는 미국의 점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0월 5일, 총사퇴한다. 대신에 총리가 된 인물이 외교관 출신의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였다. 


시데하라가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어?"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이만 따지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총리 스즈키 간타로(1868년생)가 시데하라(1872년생)보다 네 살 더 많다. 그러나 총리로 지명될 당시 스즈키는 추밀원 의장으로 현역에 있었던 반면, 시데하라는 은둔 생활을 하며 잊힌 인물이었던 것이다.


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외교관 시험을 통과한 시데하라의 외교관으로서의 첫 근무지는 인천이었다. 러일전쟁 발발 당시에는 부산의 영사관에서 전보 등을 담당했다. 러시아 공사관의 전신망을 끊어서 러시아의 초기 대응을 지연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4]


이후 경력을 쌓은 시데하라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의 1920년대에 외무장관이 되어 이른바 '시데하라 외교'를 펼쳤다. 영국, 미국 등과는 협조하고 중국에 대해서도 개입을 자제하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일본 내부에서 군국주의가 강해지면서 시데하라의 외교 방침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 외무대신을 사임하게 된다. 1936년, 육군 강경파가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인 2.26 사건 당시에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도쿄에서 가마쿠라로 피신하기도 했다. [5]


그렇게 현역에서 물러나 있던 시데하라가 1945년 10월 9일, 73세의 나이로 총리가 된 것이다. 미국의 점령을 받게 된 일본에서 가장 필요한 총리는 전범으로 체포되거나 공직 추방을 당하지 않을 인물이었고, 미국을 상대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했다. 미국과 영국에도 외교관으로 체류한 적이 있고, 군국주의에 반대했던 시데하라는 적임자였다. 시데하라의 뒤를 이은 요시다 시게루 역시 미국과 영국에 대해 잘 아는 외교관 출신의 강점을 발휘해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10월 11일, 시데하라를 만난 맥아더는 이른바 5대 개혁을 주문한다. 여성 해방, 치안유지법 폐지, 노조 결성 장려, 교육 민주화, 경제 민주화였다.

 

하나씩 살펴보겠다. 일단 여성 해방 면에서는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어 1946년 4월의 총선거에서는 여성이 처음으로 선거권을 행사했다. 1947년에는 민법이 개정되면서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일제시대에 시작된 호주제가 한국에서는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2005년에야 위헌 판결을 받아 2008년에야 폐지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둘째로 치안유지법과 특별고등경찰이 폐지되었다. 특별고등경찰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를 악랄하게 탄압했던 것으로 악명 높았다. 


당시 치안유지법으로 투옥된 일본의 정치범 중에 미키 기요시(三木清)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1920년대에 독일에 유학해서 하이데거에게 배운 미키는 일본에 귀국한 뒤에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활약했다. 이후 동아협동체 구상 등을 지지하며 일본의 군국주의에 협력했지만, 1945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다가 9월 26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일본이 항복하고 한 달 이상이 지난 사망에 충격을 받은 일본의 지식인들과 점령군은 정치범 석방을 서두르게 되었다. 

 

참고로 안네 프랑크는 독일이 항복하기 두 달 전에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고, 윤동주는 일본이 항복하기 6개월 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떴다. 불과 몇 달 차이로 세상을 떠난 그들의 운명이 애통할 따름이다.


10월 10일, 정치범 439명이 석방되었다. 이때 석방된 정치범 중에는 18년간 옥살이를 한 공산당의 지도자 도쿠다 규이치(徳田球一)도 있었다. 이때 공산당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여기며 "점령군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6] 군국주의 치하에 탄압을 당했던 공산당은 12월 1일 재건 대회를 열고 천황제 타도를 선언했다. 이듬해 1월 14일에는 15년간 소련과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노사카 산조(野坂参三)가 귀국했다.


셋째로 노조 결성을 장려했다. 노조가 자유화된 초기의 산별회의에서는 공산당을 비롯한 급진 좌파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넷째로 교육 민주화였다. 교련과 일본사 등의 과목이 폐지되었고, 교과서 내용도 민주적으로 바뀌었다. 당시 소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은 직전까지 군국주의를 선양하던 교과서가 어느 날 갑자기 부적절한 부분에 먹칠된 것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경제 민주화는 재벌 해체와 토지개혁이 주된 내용이었다. 1945년 11월 6일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의 15개 재벌을 해체 대상으로 정했고, 이듬해에는 지주(持株) 회사 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나 해체 대상이 되었던 미쓰비시, 미쓰이 등은 지주회사가 없어졌을 뿐 현재도 대기업으로 남아 있다.


토지 개혁으로 인해 많은 소작농이 자작농이 되었다. 1941년 46.2%를 차지했던 소작지는 1949년에는 13.1%까지 줄었다.[7] 맥아더는 토지개혁의 성공이 공산주의의 방벽이 되었다며 "점령군의 가장 큰 업적"[8]이라고 자평했다.


소작농들이 지주로부터 해방된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홋카이도의 아이누 지주들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아이누 민족은 홋카이도 지방에서 수렵과 어로 등을 선주민이었는데,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들이 홋카이도에 이주해 왔다(엄밀히 말해서 아이누도 국적상으로는 '일본인'이지만, 여기서는 민족으로서의 '일본인'과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표기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누 민족이 지주로 등록되어 있고, 일본인이 소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누는 원래 농사를 짓지 않았기에 사실상 일본인에게 유리한 계약이 이뤄졌다.


그런데 토지 개혁이 홋카이도에도 적용되면서 명목상 지주로 등록되어 있던 아이누들은 토지 소유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아이누들은 정보에 뒤쳐져 있었기에 GHQ의 토지 개혁 방침을 알고 나서 일본인들이 뒤늦게 소작농으로 계약을 맺어 토지를 차지하는 경우조차 있었다. 홋카이도 아이누협회는 아이누 지주는 토지 개혁의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청원했지만, 일본 정부는 아이누의 토지 역시 일반 토지와 마찬가지로 취급했다.[9]  


종교개혁도 이뤄졌다. 1945년 12월 15일, 이른바 신도지령(神道指令)이 내려져 정교분리가 이뤄지게 된다. 전몰자들을 신(神)으로 모시는 야스쿠니신사는 한때 폐지가 검토되기도 했지만, 종교법인으로 재탄생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이렇듯 점령 초기에 GHQ, 특히 민정국(GS)이 추진한 개혁은 전체적으로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보수적이었던 맥아더의 성격을 생각하면 의외지만, 민정국에는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가 일단락되고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본격화됨에 따라 GHQ는 반공주의적 성향이 강해지게 된다. 


이러한 개혁들과 함께 점령군은 일본인을 상대로 홍보 정책 역시 수행했다.


GHQ 산하의 민간검열국(CCD, Civil Censorship Detachment)이 검열을 했다. 검열 대상은 편지, 전보, 전화, 신문, 출판물, 영화, 연극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대일본제국 체제에서도 출판물 등에 대한 검열은 이뤄졌지만, 차이가 하나 있었다. 대일본제국 체제에서의 검열은 문제가 된 부분을 검은색으로 칠하거나 X 표시를 했다. 즉, 검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GHQ의 검열은 문제가 된 부분을 아예 삭제했다. 공식적으로는 검열 사실 자체를 감추었던 것이다. 단, 우편물에 관해서는 봉투를 뜯어보고 검열 도장을 찍어서 배달했다.[10]


현재는 진보 성향 매체로 분류되는 『아사히신문』은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정부에 협력하며 군국주의를 선양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1945년 9월 15일, 『아사히신문』은 "원자폭탄 사용과 무고한 국민의 살상이 병원선 공격과 독가스 사용 이상으로 국제법 위반, 전쟁범죄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의 발언을 보도했다. 결과 GHQ로부터 9월 18일부터 이틀간의 업무 정지 명령을 받는다.[11] 이후 일본 언론은 GHQ의 지침에 따른 보도를 하게 된다.


GHQ에는 민간감열국과는 별개로 민간정보교육국(CIE, Civil Information Educaton)이란 부서도 있었다. 교육 개혁, 종교 개혁, 언론 동향 분석,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홍보 정책 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활동 중 1945년 12월 9일부터 이듬해 2월 10일까지 NHK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진상은 이렇다(真相はかう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감추거나 왜곡한 진실을 알렸는데, 난징학살 등의 만행 역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람이 많았다[12]. GHQ는 이 밖에도 방송과 서적 등을 통해 일본 군부의 잘못과 미국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 30일, NHK 라디오에서 교향악단이 연주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이하 합창 교향곡)이 방송되었다.[13] 야하바 다카시(矢羽々崇)는 패전 직후의 일본에서 합창 교향곡은 "자유와 평등, 평화, 그리고 연대"[14]의 상징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합창 교향곡은 아마추어 합창단들에 의해 공연되었고, 연말을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1] 増田弘(2009)『マッカーサー:フィリピン統治から日本占領へ』中央公論新社, pp.9-10.

[2] 福永文夫(2014)『日本占領史1945-1952:東京・ワシントン・沖縄』中央公論新社, pp.11-12.

[3] 앞의 책, p. 32. 

[4] 熊本文雄(2021)『幣原喜重郎:国際協調から占領期の首相へ』中央公論新社, pp.18-19.

[5] 앞의 책, pp. 185-186.

[6] 福永文夫(2014)『日本占領史1945-1952:東京・ワシントン・沖縄』中央公論新社, p. 52.

[7[ 雨宮昭一(2008)『占領と改革』岩波書店, p.53.  

[8] 増田弘(2009)『マッカーサー:フィリピン統治から日本占領へ』中央公論新社, pp.353-355.

[9] 小畑清剛(2010)『「一人前」でない者の人権:日本国憲法とマイノリティの

哲学』法律文化社, pp.66-68.

[10] 山本武利(2021)『検閲官:発見されたGHQ名簿』新潮社, p.35.

[11] 加茂道子(2022)『GHQは日本人の戦争観を変えたか:「ウォー・ギルト」をめぐる攻防』光文社, p.53.

[12] 鴨下信一(2005)『誰も「戦後」を覚えていない』文藝春秋, p.183.

[13] 矢羽々崇(2022)『日本の「第九」:合唱が社会を変える』白水社, p.11.

[14] 앞의 책,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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