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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Nov 11. 2023

8. 일본국헌법 제정

천황제와 평화헌법

미국의 점령이 시작된 일본에서 가장 큰 화두는 천황제와 히로히토의 운명이었다. 미국 정부 내에서는 점령 정책을 위해서 히로히토를 이용하기로 했지만, 국내 여론은 히로히토의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강했다. 당시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3%가 사형, 37%가 종신형 등의 처벌을 원했다.[1] 국제적으로도 호주와 소련 등 다른 연합국은 천황제를 반대하고 있었다.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가 맥아더를 방문해서 회담했다.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히로히토가 자신의 처분을 기꺼이 맡기겠다고 발언했다며,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2002년 외무성과 궁내청이 발표한 회담 기록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었다.[2] 아마도 비슷한 뉘앙스의 발언은 했지만, 맥아더가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회담을 통해 맥아더는 천황에 대해 호감을 가졌고, 점령 정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방침이 확정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맥아더와 히로히토가 함께 찍힌 유명한 사진이 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진을 공개하려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틀 뒤 GHQ의 압박으로 공개하게 된다. 그만큼 맥아더에 비해 히로히토가 왜소하게 찍혔던 것이다.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는 "신 일본 건설 조서," 이른바 인간선언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짐과 그대들 국민 사이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인해 이어져 있고, 단순한 신화와 전설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천황을 신으로,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으로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졌다는 가공의 관념에 의한 것이 아니다"[3]라는 말이 나온다. 태평양전쟁 당시 천황을 신으로 떠받들던 풍조를 부정한 것이다.


인간선언을 통해 일본이 천황제를 떠받드는 군국주의로 다시 빠질 위험은 일단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1월 25일, 맥아더는 통합참모본부에 "히로히토에게 전쟁책임은 없다"라고 보고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GHQ는 헌법을 새로 만들어 군국주의의 싹을 뽑고, 일련의 민주화 정책을 완성시키려 했다.


1889년 제정된 '대일본제국헌법'은 군주국이었던 독일 헌법을 본받아 만들었는데, 기본적으로 천황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제3조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다.
제4조 천황은 국가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하고, 이를 헌법의 조항에 따라 행한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국은 이러한 '대일본제국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맥아더는 1945년 10월 4일, 전직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와의 회담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국제파를 자처하던 고노에는 맥아더의 신임을 얻었다는 자신감에 젖어 개헌안을 만들어 11월 22일 천황에게 상소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간과한 사실은 고노에가 중일전쟁 발발 당시, 그리고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의 총리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 신문은 전범 용의자가 되어야 할 고노에에게 개헌 작업을 맡긴 GHQ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냈고, GHQ는 고노에에게 개헌을 맡긴 바가 없다며 꼬리를 잘랐다. 12월 6일 전범 용의자로 지목된 고노에는 열흘 뒤 청산가리를 복용해 자살했다.


고노에를 대신해 개헌 문제를 담당하게 된 것은 10월 25일 발족한 헌법문제조사위원회이었다. 상법학자였던 마쓰모토 조지(松本丞治)가 위원장이었는데, 마쓰모토를 비롯한 위원회 멤버들은 개헌에 소극적이었다.


예를 들어 헌법문제조사위원회 고문으로 참여한 사람 중에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라는 헌법학자가 있다. 미노베는 도쿄제국대학에서 헌법을 가르치던 인물이었는데,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황기관설은 독일의 국가법인설을 바탕으로 천황은 대일본제국헌법의 기관이라는 학설이었다.


1935년, 군국주의자들이 미노베의 천황기관설이 불경하다며 비판을 가하면서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미노베는 귀족원 의원을 사퇴하고, 와세다대학 등 겸임하고 있던 대학의 강사 및 고등문관시험 출제위원 자리도 물러서야 했다. 급기야 우익 단체 간부가 미노베의 자택을 찾아 권총을 쏴서 부상을 입히기조차 했다.[4] 이른바 천황기관설 사건이다.


일련의 논란이 있고 나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내각은 1935년 8월 3일, "대일본제국 통치의 대권은 엄연히 천황에 있음이 명백하다"[5]는 이른바 국체명징(國體明徵)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천황의 절대성이 강화되고,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이렇듯 미노베는 천황제 이념의 피해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태평양전쟁이 끝난 직후의 미노베는 대일본제국헌법 개정에 반대했다. 미노베의 천황기관설에 따르면 대일본제국헌법은 충분히 민주적인 입헌군주제 헌법이었고, 이를 악용한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이 문제였기에 헌법을 고칠 필요성은 없었던 것이다. 미노베뿐 아니라 위원장이었던 마쓰모토를 비롯해 헌법문제조사위원회는 개헌에 소극적이었다. GHQ가 시키니까 억지로 개헌안을 만들기는 했지만, 대일본제국헌법을 소폭 수정한 수준에 그쳤다.


1946년 2월 8일, 헌법문제조사위원회는 개헌 초안을 제출한다. 그러나 마쓰모토 초안에 대해 GHQ는 "가장 보수적인 민간 헌법 시안보다 훨씬 뒤떨어졌다"며 평가절하한다. 이에 휘트니 준장이 이끄는 민정국(GS)은 독자적으로 헌법 초안을 작성하게 되는데, 이때 맥아더가 휘트니에게 지시한 3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천황은 국가의 최고위에 존재한다.
황위는 세습된다.
천황의 직무와 권한은 헌법에 의해 행사되고, 헌법에 제시된 국민의 기본적 의사에 응답하는 것이다.
2. 국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은 폐지한다. 분쟁 해결 수단으로써의 전쟁, 나아가 스스로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전쟁도 포기한다. 일본은 방어와 보호를 세계적으로 숭고한 이상에 맡긴다.
일본은 장래에도 육해공군을 가질 권한이 없으며, 교전권도 가지지 않는다.
3. 봉건제는 폐지된다.
황족을 제외한 귀족의 권리는 현재 살아있는 이들의 대에서 끊긴다. [6]


이를 바탕으로 GHQ 민정국은 일주일 만에 개헌안을 작성했다. 이렇게까지 급속히 진행하게 된 배경에는 1946년 2월 말에 11개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가 출범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이 있었다. 그때까지 본국의 영향이 맥아더의 GHQ는 극동위원회가 출범하기 전에 개헌까지 마무리하고자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GHQ 내에서도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민정국이 작성에 주도했기에 새 헌법 역시 진보적 색채가 강해졌다.


2월 13일, 민정국장인 휘트니 준장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와 마쓰모토 조지를 면담한다. 마쓰모토를 비롯한 일본 측 인사들은 이 자리에서 자신들이 만든 개헌안에 대한 답변을 들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자신들의 개헌안은 완전히 거부되고, GHQ가 작성한 개헌안을 받게 된 것이다. 당연히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휘트니는 요시다와 마쓰모토에게 GHQ의 개헌안을 검토할 수 있는 15분의 시간을 주고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때 방 안에 들어와 "원자력 햇빛 속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We've just been basking in the warmth of the atomic sunshine.)고 말했다.[7] 휘트니가 이러한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 이유는 원폭 투하에 대해서 일본 측에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심하게 말하면, 개헌안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각오하라는 협박에 가까웠다.  


일본 정부는 내심 GHQ의 개헌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일본 정부는 GHQ 개헌안을 번역하고 다듬은 끝에 4월 17일 초안을 공표한다. 이후 개헌안은 대일본제국헌법에 규정된 개헌 절차를 통해 제정되었다. 개헌안은 10월 7일, 중의원에서 가결되었고, 10월 29일, 추밀원에서 통과된 후 천황의 재가의 절차를 거쳐 11월 3일에 일본국헌법으로 공포되었다. 6개월 뒤인 1947년 5월 3일, 새 헌법이 시행된다. 5월 3일은 헌법기념일이라는 이름의 공휴일이다. 


일본국헌법이 공포된 11월 3일은 메이지 천황의 생일이다(현재는 '문화의 날'이라는 공휴일이다). 일본국헌법이 시행된 5월 3일은 1946년 도쿄재판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대일본제국헌법과의 연속성을 남기려는 일본 측과 점령국으로서의 권력관계를 강조하려는 미국 측의 의도가 공교롭게도 일치한 일정인 것이다. 


일본국헌법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리는데, 전쟁을 비롯한 무력 행사와 교전권을 부정한 9조가 있기 때문이다.


9조 1항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 행사는 영구히 포기한다.
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아니한다.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써의 전쟁을 포기한 1항은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반면, 군대와 교전권을 포기한 2항은 현재까지도 세계 헌법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는 UN을 통한 집단안전보장이 개별 국가의 자위권을 대체하리라는 구상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의 9조는 세계 여러 나라의 선구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냉전이 심화되면서 UN을 통한 집단안전보장은 기능하지 않았고, 일본 역시 1954년 자위대를 창설하면서 재무장하게 된다. 자위대는 어디까지나 군대가 아니라는 명목으로 9조 개헌 여부는 현재까지 일본에서 좌파와 우파의 논쟁 대상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1946년 6월 28일 중의원 심의 당시, 공산당 의원 노사카 산조(野坂参三)가 침략전쟁과 방어전쟁을 구별해야 하지 않냐고 질문했다. 이에 당시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는 "최근 대부분의 전쟁은 국가를 방어하는 권리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것이 전쟁을 유발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8]라고 대답했다. 현재, 요시다 시게루가 몸을 담았던 자민당은 현재 9조를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공산당은 9조 개정에 반대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두 정당의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우파가 현재 개헌을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본국헌법이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된 헌법이라는 점이다. 그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이 GHQ의 개헌안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며 중의원과 귀족원에서는 실질적인 수정이 이뤄졌다. 예를 들어 헌법 25조(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는 조항)는 사회당 의원이었던 모리토 다쓰오(森戸辰男)가 추가한 것이다. 모리토가 소속되어 있던 헌법연구회가 발표한 개헌 시안은 GHQ도 보고 참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 하나 유명한 사례는 훗날 총리가 되는 아시다 히토시(芦田均)가 9조 2항에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라는 문구를 추가한 것이다. 9조 2항은 어디까지나 침략전쟁을 위한 군대를 보유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자위를 위한 군대를 보유하는 것은 헌법상 허용된다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헌법학계의 주류는 그러한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이었다면 군대를 수식하겠지만,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군대를 보유하지 않겠다는 문장 전체를 수식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일본국헌법 제정에 이르게 된 경위를 보면 천황을 일본국의 상징으로 규정한 1조와 전쟁을 포기한 9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상징천황제를 지지하면서도 일본국헌법을 부정하는 우파도, 9조를 일본인의 평화에 대한 평화헌법으로 치켜세우는 좌파도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이다.


일본국헌법의 3대 원칙은 국민주권, 기본적 인권, 평화주의로 규정된다.


일본국헌법 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로부터 나온다"이다.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닌 상징으로 자리매김으로써 천황제를 국민주권의 틀 안에서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일본국헌법이 개정된 이후, 황실 제도에 대한 법률인 황실전범 역시 개정되어 일본국헌법과 마찬가지인 1947년 5월 3일,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1947년 10월 14일, 51명의 황족이 평민으로 강등되며, 황족의 범위가 크게 줄었다. 


황실전범에서 부계 남자만이 황위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조항은 유지되었지만, 정실에서 난 적자에게만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황위 계승자는 부계 남자뿐인데 황족의 범위는 줄었고, 결과적으로 현재는 황위 계승자가 부족하다는 것이 천황제의 존립에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현재 천황인 나루히토에게는 딸밖에 없기에 한때 여성도 황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황실전범 개정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2006년 나루히토의 남동생에게 아들이 태어나면서 부계 남자만 황위를 계승할 수 있게 한 현재의 천황제는 당분간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황실은 증권과 부동산, 미술품 등 15억 9천만 엔 등의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과세 대상이 아니었다. 점령기에 황실의 특권이 폐지되면서 1500만 엔 정도의 현금을 제외한 대부분 재산은 국유화되거나 세금으로 납부되었다.[9] 현재 도쿄의 유명 관광지가 된 하마리큐(浜離宮) 정원을 비롯한 공원들은 원래 황실 소유였다. 현재 일본 국립박물관의 소장품 중 일부 역시 이때 황실로부터 이관된 것이다.


다른 황족들 역시 평민이 되면서 재산이 급격히 줄었다. 패전 직후 잠시 총리를 맡았던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는 평민이 된 뒤, 신주쿠에 식료품점을 차려 생계를 꾸렸다.[10] 


[1] 加藤典洋(2019)『9条入門』創元社, p.74

[2] 福永文夫(2014)『日本占領史1945-1952:東京・ワシントン・沖縄』中央公論新社, p.50

[3] 앞의 책, p.90.

[4] 原田武夫(2014)『甦る上杉慎吉:天皇主権説という名の亡霊』講談社, pp.173, 174.

[5] 앞의 책, p.174.

[6] 加藤典洋(2019)『9条入門』創元社, p.136.

[7] 武田徹(2011)『私たちはこうして「原発大国」を選んだ:増補版「核」論』中央公論新社, pp.20, 21. 

[8] 加藤典洋(2019)『9条入門』創元社, pp.183, 184. 

[9] 広田四哉(1995)「旧産階級の没落」『占領と改革』岩波書店, pp.144-146.

[10] 앞의 책,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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