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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Jun 10. 2024

9. 1946년 총선

하토야마 이치로와 요시다 시게루의 등장

1940년, 제국의회의 원내 정당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 국민동맹, 사회대중당이 해산하여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대정익찬회는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관변단체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의 21대 중의원 선거에서는 466석 중 381석이 대정익찬회가 추천한 후보가 당선되었다.


소수지만 경찰과 당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보들도 있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을 추진하던 군부 파시즘 세력에 저항한 사람들이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安倍寛) 역시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은 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가 A급 전범 혐의를 받았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친할아버지 아베 간은 같은 야마구치(山口) 출신이라도 기시 노부스케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아베 간은 1894년 야마구치에서 태어났다. 혼슈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한국의 부산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야마구치는 총리를 일본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야마구치의 전신인 조슈번(長州藩)은 사쓰마번(薩摩藩)과 더불어 1868년 메이지유신의 중심 세력이었던 데다가 사쓰마(=가고시마) 세력이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의 반란이 실패하고 기세를 잃고 나서도 조슈(=야마구치) 세력은 권력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타로,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그리고 아베 신조에 이르기까지 야마구치 현이 배출한 총리는 현재까지 8명이나 된다.


그러한 야마구치가 메이지유신 이후 전성기를 맞이했던 시기에 태어난 아베 간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고향의 촌장과 현의회 의원을 역임한 뒤, 1937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42년 중의원 선거 당시, 아베 간은 도조 히데키 정권과 대정익찬회에 반대하며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측근의 증언에 따르면, 아베 간이 대정익찬회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태평양전쟁과 군부에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


그러나 아베 간을 비롯한 무소속 의원들은 당선되고 나서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전시 내각은 군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기에 국회는 유명무실했던 데다가,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은 무소속 의원들은 입지가 좁았던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극적으로 반전된다.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은 의원들은 자신의 이름이 GHQ가 작성한 공직추방자 명단에 오르지는 않을까, 심지어 전범으로 체포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반면에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를 비롯한 무소속 의원들은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여기며, 새로운 체제의 중심에 설 그림을 그렸다. 1945년 11월 9일, 하토야마를 총재로 하여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일주일 뒤인 11월 16일, 대정익찬회 소속이었던 의원들은 진보당을 창당해 결집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GHQ의 공직추방을 당했고 정치생명을 이어가지 못했다. 12월 18일에는 중도주의, 조합주의를 표방하 협동당이 창당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이들 보수, 중도 정당들은 이후 10년간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1955년, 자민당으로 합류하게 된다. 


사회당은 11월 2일, 가타야마 데쓰(片山哲)를 서기장으로 하여 창당했다. 1922년 창당 이후 탄압을 당했던 공산당은 12월 1일에 재건대회를 가졌다.  


아베 간 역시 야마구치에서 곧 있을 중의원 선거를 준비했다. 그러나 선거를 두 달 앞둔 1946년 1월 29일, 심장마비로 5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2] 아들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가 기시 노부스케의 딸과 결혼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951년, 둘 사이에서 신조가 태어난 것은 3년 뒤인 1954년의 일이다. 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1946년 4월 10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선거 결과는 총 468석 중 자유당이 140석을 차지하며 1당이 되었고, 94석을 차지한 진보당과 92석을 차지한 사회당이 뒤를 이었다. 협동당은 14석, 유일하게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던 공산당은 5석에 그쳤다.


1946년의 민심은 태평양전쟁 당시의 구체제를 그리워하는 세력이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둘 사이의 중도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보수세력과 중도세력이 연합한 자민당이 의석수의 2/3를 차지하고, 공산당과 사회당이 의석수의 1/3을 차지한 이른바 '55년 체제'의 전조는 이미 여기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직 일본국헌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지만, 22대 중의원 선거에서는 최초로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  


79명의 여성 후보가 출마해 그중 39명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468석 중 39석은 10%에 육박하는 수치로, 여성참정권이 처음으로 발효된 선거 치고는 당선율이 높은 편이었다. 문제는 이후 선거부터 여성 의원의 비율이 1%대로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중의원에서 여성 의원의 비율이 1946년 총선을 넘어선 것은 60년 가까이 지난 2005년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현재까지도 여성 의원 비율이 낮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고 있다.


1946년 선거에선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한 반면, 참정권을 박탈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인, 대만인, 그리고 오키나와인들이었다.


식민지에는 선거구가 없었고, 주민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남자 보통참정권이 주어진 1925년 이후 내지(=일본 본토)에 거주하던 조선인과 대만인은 제국의회 선거에 입후보하고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박춘금이라는 조선인이 중의원의 도쿄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던 사실은 유명하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에도 법적으로 조선인 및 대만인의 국적 자체는 유지된 상태였다. 선거법 개정을 논의 중이던 1945년 10월 19일까지만 해도 조선인 및 대만인의 참정권 역시 유지하는 방침이었다.[3]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이 제기되면서 최종적으로는 조선인 및 대만인의 법적 지위가 확정될 때까지 참정권을 '정지'하는 것으로 선거법이 개정되었다.[4]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공산당에 투표해 천황제를 타도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이후 조선인 및 대만인은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분류되면서 귀화하지 않는 한 일본의 선거에 참가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미군이 직접 통치하던 오키나와 및 오가사와라 제도에서는 선거가 치러지지 않았다. GHQ는 1946년 1월, 북위 30도를 기준으로 일본 본토에서 행정적으로 분리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에서는 1972년까지 미군의 직접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


1946년의 선거는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면서 민주화가 진행된 반면, 구식민지인들은 참정권을 잃은 선거였다.



선거 후 제1당이 된 자유당의 하토야마 이치로가 총리가 될 터였다.


하토야마 이치로의 아버지 하토야마 가즈오(鳩山和夫)는 콜롬비아 대학과 예일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와세다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다. 중의원에서 8선을 했고, 의장까지 지냈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1915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뒤, 1942년 선거에선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고도 10선에 성공했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별장지로 유명한 가루이자와(軽井沢)로 피신하여 정계와는 거리를 두었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자신이야말로 군부에 저항한 자유주의자라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원폭 투하를 전쟁범죄라고 비판한 하토야마는 점령 당국인 GHQ가 보기에 지나치게 보수적이었다. 선거로부터 한 달이 지난 5월 7일, 하토야마는 공직추방을 당하게 된다.


공직 추방을 당한 하토야마 이치로 대신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 인물이 요시다 시게루였다.


요시다 시게루는 1878년, 다케우치 쓰나(竹内綱)의 5남으로 태어났다. 다케우치 쓰나는 오늘날의 고치현에 해당하는 도사(土佐)번의 무사 출신이었는데, 메이지유신 이후 사업을 벌여 군함도로 알려진 하시마 등의 탄광을 개발했고, 조선의 경부선, 경인선 철도 부설 계획을 제안하기도 했다.[5]


다케우치 가문에서 태어난 시게루가 요시다 성을 갖게 된 것은 세 살 때, 사업가 요시다 겐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부터다. 요시다 겐조는 시게루가 열 살도 되기 전에 요절했고, 시게루는 평생 먹고살 수 있을 거액의 유산을 상속하게 된다.[6]


요시다는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외교관으로 임관하게 된다. 청년 외교관 요시다는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총애를 받아 조선 총독부 서기관도 겸임했다. 데라우치는 총리로 발탁되면서 일본으로 돌아갈 때, 요시다에게 자기 밑에서 비서를 하지 않겠냐고 권했다. 그러자 요시다는 "제가 총리는 몰라도 총리 비서 할 그릇은 못 됩니다"[7]라고 말하며 고사했다고 한다. 요시다 시게루의 유머 감각과 자신감을 드러내일화다. 


어찌 보면 요시다는 정치인의 지시따라 움직이는 관료보다는 스스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정치인이 적성에 맞았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집안 배경과 학력에 비하면 요시다 시게루는 외교관으로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 회담에도 참석했고, 여러 나라에서 공사와 영사를 역임했지만, 1930년대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대사를 한 것이 경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요시다의 '건방진' 성격뿐 아니라 일본 정세의 영향도 있었다. 당시 요시다는 독일과의 동맹에는 반대했고, 영국, 미국과의 협조를 주장했는데, 군국주의를 추진하여 국제 사회에서 고립의 길을 걷던 일본에서는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중국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요시다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자체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요시다의 평전을 쓴 하라 요시히사(原彬久)는 외교관 당시 요시다의 방침을 "일본의 영토 확장, 특수 권익 확보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클럽'과의 협조 아래에 추구해야 한다"[8]고 정리했다.   


1936년 2.26 사건 이후, 외교관 동기였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가 총리로 취임했을 때, 큰 뜻을 펼칠 기회가 찾아왔다. 히로타가 요시다를 외무장관으로 발탁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반발로 외무장관은 무산되었고, 대신에 영국 대사로 부임하게 된다. 일본이 패전한 뒤, 히로타는 A급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만약 요시다가 이때 히로타 밑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더라면, 훗날 총리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들어맞는 사례다. 


1945년 3월에는 군부에 의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40여 일간 구금되기도 했는데, 이 역시 미국의 점령이 시작되고 나서는 일종의 훈장처럼 작용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점령이 시작되면서 요시다에게 길이 열렸다. 시데하라 정권에서 외무장관이 되어 점령군 당국과의 조율을 담당하게 되었다.


공직추방으로 낙마하게 된 하토야마가 자신을 대신해 총리를 지명한 인물이 요시다였다. 이때 요시다는 네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첫째, 정당의 인사는 하토야마가 맡되, 내각 인사는 요시다에게 맡길 것. 둘째, 돈 걱정은 하토야마가 할 것. 셋째, 총리를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둘 것. 넷째, 하토야마의 공직추방이 해제되면 정권을 돌려줄 것.[9] 


이중 네 번째 조건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요시다와 하토야마의 주장이 엇갈린다. 하토야마는 추방이 해제되면 정권을 물려주기로 했다고 한 반면, 요시다는 그러한 약속을 부정했다. 이후 둘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결국 하토야마가 총리가 되는 것은 8년이나 지난 1954년이 되어서다. 그때까지는 요시다 시게루의 시대가 계속된다.


[1] 아오키 오사무(2017)『아베 삼대:'도련님'은 어떻게 '우파'의 아이콘이 되었나』서해문집, p.83.

[2] 앞의 책, p.91.

[3] 水野直樹(1996)「在日朝鮮人・台湾人参政権『停止』条項の成立:在日朝鮮人参政権問題の歴史的検討(1)」世界人権問題研究センター編『研究紀要』p.45.

[4] 앞의 책, p.55.

[5]原彬久(2005)『吉田茂:尊王の政治家』岩波書店, pp.6, 7.

[6] 앞의 책, p.19.

[7] 앞의 책, pp.38, 39.

[8] 잎의 책, p.68.

[9] 잎의 책,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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