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일본의 선택지는 포츠담 선언 수락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는 여전히 국체 호지(國體護持)를 주장했고, 군부의 반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내각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8월 9일의 각료회의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8월 10일 자정, 최고 전쟁지도자회의를 열게 된다. 최고 전쟁지도자회의는 각료들 중에서 총리대신, 외무대신, 육군대신, 해군대신, 육군 참모총장, 해군 군령부 총장 6명만이 모이는 것이 관례였다. 8월 10일의 회의에는 추밀원 의장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가 참가하고, 천황 히로히토가 임석했다.
스즈키는 포츠담 선언 수락 여부를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추밀원 의장 히라누마가 수락에 찬성한 반면, 육군대신 아나미, 육군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해군 군령부 총장 도요타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3으로 의견이 갈리자 스즈키는 히로히토에게 의견을 묻는다. 히로히토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찬성하는 의견을 표명한다. 육군대신 아나미도 여기에는 반발하지 못하고,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히로히토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러한 히로히토의 결정을 "성단(聖斷)"이라고 부른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된 이후로 일본의 체제는 명목 상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명목과는 달리 천황의 권한은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고,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화를 빌린 천황제는 종교적 색채를 띈 특이한 형태였다. 천황의 종교적 권위는 강조되었지만, 천황의 실권은 제한적이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세력이 실권을 가졌고, 다이쇼 시대에는 정당정치와 함께 민주주의에 의거한 정치인들이 권력을 쥐었다. 그러나 지금과 달리 당시의 내각은 선거를 통해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는 대신 주권자인 천황에게 책임을 졌고, 민주주의의 의원내각제가 뿌리내리는 일은 없었다.
이러한 입헌과 군주의 간극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1930년대의 군부였다. 2.26 쿠데타 당시, 히로히토가 강경 진압을 명령했듯이 히로히토 자신은 군부의 과격한 군국주의자들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부는 천황의 신성한 권위를 강조하며 민주적 통제를 무력화시켰고, 히로히토는 정부와 군부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지는 않았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은 신성불가침의 천황제, 대중에 영합한 정치인, 그리고 전쟁을 추진한 군부가 공존한 키메라와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러한 책임의 소재가 불분명한 당시의 일본을 두고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무책임 체계"라고 명명하며 비판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전쟁 책임은 정부의 지도자에 있고 "천황과 국민은 책임이 없다"[1]고 주장했다. 하지만 히로히토가 입헌군주제의 군주로서 아무런 실권을 행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전쟁 방침 등에 대해서 회의에서 어느 정도 의견을 피력한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재자 히틀러나 여느 전제군주들처럼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을 비롯한 주요 정치적 사안들을 실질적으로 결정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1945년 8월 9일, 히로히토가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한 것은 정치 과정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8월 13일의 각료회의에서 내무대신 아베 겐키(安倍源基)는 대부분의 각료들이 참석하지 않은 최고전쟁지도자회의에서 천황이 항복을 결정한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며 따져 묻기도 했다.[2] 거부권을 행사하는 군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결정을 빌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는 스즈키와 히로히토의 신뢰 관계가 전제되어 있었다. 명목 상으로는 스즈키는 도쿄재판 당시 진술서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은 "내각의 결정을 상소해서 재가를 받은 것"[3]이라며 헌법의 절차를 강조했다.
8월 10일, 일본은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미국에 전하면서 국체 호지, 즉 천황제 존속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원활한 점령을 위해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미국이 천황제 존속이라는 조건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정부 내에서도 강경파가 있었고, 미국 국내 여론이나 동맹국인 소련 및 영국 역시 천황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천황에 대한 미국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제1항 천황 및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항복 조항 실시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조치를 취할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제한 아래(subject to)에 놓이는 것으로 한다.
제4항 일본 정부의 확정적 형태는 포츠담 선언을 존중하며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하는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한다. [4]
"subject to"를 "종속된다"가 아닌 "제한 아래에 놓인다"라고 번역한 것은 항복을 성사시키기 위한 외무성의 술수였다. 명시적 약속은 피했지만, 천황제 존속을 암시하는 미국 정부의 의도는 이해했다.
그러나 정부 내의 주전파는 이 대답에 납득할 수 없었다. 며칠간 정부 내에서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인지, 그 진의를 다시 조회할 것인지를 두고 주전파와 주화파의 암투가 재현된다.
이번에도 결정을 내린 것은 히로히토였다.
국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다는 얘긴데, 나는 이 회답의 뜻을 보건대 상대방이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한다. 상대방의 태도에 일말의 불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일단 설득력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의심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전체의 신념과 각오의 문제라 생각한다. [5]
이로써 포츠담 선언 수락이 결정되었다. 내각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천황 조서를 작성했다.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해 포츠담 선언 수락을 전한 것은 8월 14일 밤 11시였다. 일본 국내에는 8월 15일 정오, 라디오를 통해 발표된다. 밤중에 종전 사실이 알려지면 군대를 비롯해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고 아나미 육군대신이 우려했기 때문이다.[6] 실제로 8월 15일 미명, 황궁에 주둔해 있던 육군의 일부 강경파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항복 선언을 발표하는 히로히토의 라디오 테이프를 탈취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귀가한 아나미는 8월 15일 미명 할복자살한다.
아나미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과 파푸아 뉴기니 일대의 전선에서 싸웠지만, 특출 나게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러일전쟁 당시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와 비견될 정도로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비서관이었던 하야시 사부로조차 "지성이 뛰어나지 않았"[7]다고 말할 정도로 범용한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중위로 임관할 당시, 육사 동기들보다 한참 뒤처졌고 육군대학에 4수 만에 합격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즈키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등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군부 내에서 인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스즈키 내각이 발족된 뒤 4개월 동안 아나미는 각료회의에서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가장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아나미의 평전을 쓴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는 그가 육군 내의 폭발을 저지하면서 내각을 유지하기 위해 본심과 달리 일부러 강경 발언을 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당시 일본의 내각제는 각료 중 한 명이라도 사직하면 내각 전체가 총사퇴하도록 되어 있었다. 도조 히데키 내각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 기시 노부스케가 이 방법을 썼다. 아나미 역시 스즈키 내각의 화평 노선이나 항복 결정에 진심으로 반대했더라면 본인이 사직함으로써 스즈키 내각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그 근거다. 2015년 개봉한 일본 영화 <일본 패망 하루 전>은 이러한 해석에 근거해 아나미(야쿠쇼 코지)를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아나미의 자살로부터 한 달 가까이 지난 1945년 9월 11일, 태평양전쟁 발발 시의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東条英機)의 자택에 그를 체포하기 위해 점령군이 들이닥쳤다. 도조는 권총으로 심장을 쏴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뭐 하다가 이제 와서" "자살도 제대로 못 하나"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도조 히데키만이 아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사지로 내몬 대부분의 일본군 장성들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 끝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고집하며 희생을 늘인 아나미 고레치카의 책임은 분명 크지만, 그나마 죽음으로써 책임을 진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일본에서는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로 부른다. 하지만 앞서 다루었듯이 공식적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날은 8월 14일 밤 11시다. 대부분의 2차대전 참전국은 일본의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전함 미주리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을 종전일로 기념한다(미주리는 트루먼 대통령의 고향이다).
이에 사회학자 오사와 마사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국제법의 관점에서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날은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8월 14일이거나 일본의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이어야 한다. 8월 15일은 옥음(玉音)방송이 있었던 날, 천황이 일본인에게 "전쟁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공지한 날이다. 왜 일본인은 이 날을 고집하는가? 이 날이라면 (8월 14일이나 9월 2일과 달리) '패'전이 아닌 '종'전이 되기 때문이다.[9]
8월 15일을 패전이 아닌 종전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기억하는 일본의 태도는 천황 히로히토의 옥음으로 전쟁이 끝난다는 서사와 결합해 현재까지도 이어져 이어져 오고 있다.
[1]波多野澄雄(2015)『宰相鈴木貫太郎の決断:「聖断」と戦後日本』岩波書店,p.237.
[2]加藤聖文(2009)『「大日本帝国」崩壊:東アジアの1945年』中央公論新社, p.43.
[3]波多野澄雄(2015)『宰相鈴木貫太郎の決断:「聖断」と戦後日本』岩波書店,p.227.
[4]앞의 책, p.184.
[5]앞의 책, pp.205, 206.
[6]迫水久常(2015[1973])『大日本帝国最後の四か月:終戦内閣″懐刀″の証言』河出書房新社、pp.264, 265.
[7]角田房子(2015)『一死、多罪を謝す:陸軍大臣阿南惟幾』筑摩書房, p.211.
[8]앞의 책, p.37.
[9]大澤正幸(2017)『考えるということ:知的創造の方法』河出書房新社、pp.169,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