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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한 Jan 31. 2018

#3 <고백부부>

당연함을 걷어볼 기회


 #3 <고백부부>   

  당연함을 걷어볼 기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설정에 떨리지 않을 사람도 있을까? (물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냐는 질문에 단번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과거로 돌아가는 판타지에 덤덤한 김미경 배우와 장나라 배우 같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는 지금껏 그 설정을 항상 좋아해 왔다. 가령 드라마 <나인>이라든지, 영화 <17 어게인>, <나비효과>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들이고 말이다. 과거로 돌아가 내가 바꾸고 싶은 부분을 고치고 싶단 생각은 인생에서 한 번쯤은 해보지 않나. 그때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왠지 지금의 내가 뼛속 깊이 후회하는 것들이 줄어들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조금 진부하더라도, 이런 생각의 끝에 매번 내리게 되는 결론은 과거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김미경 배우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중요한 건 현재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결론을 내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지만 말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설정을 가진 작품들은 이 결론을 상기시켜주며 우리가 과거가 아닌 현재에 정성을 쏟을 수 있게 도와주곤 한다. (단, 앞서 언급한 작품들 중 <나비효과>는 다른 케이스다.)


드라마 <고백부부>는 판타지다. 어린 아기를 키우고 있는 30대 후반의 부부가 혹독한 현실에 부딪히고 마음에 담아오던 갈등이 폭발해 이혼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다음 날, 둘이서 그들이 처음 만났던 스무 살의 한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드라마 후반부에는 이게 가능했던 판타지적 근거가 나오긴 한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다.) 현재에 질릴 때로 질린 그들은 그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반기는 듯 보인다. 인생의 흐름을 확 바꿀 수 있을 시작점인 스무 살의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고 둘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진심으로 행복해했던 부부가 시간이 흘러 지쳐 나가떨어지려는 순간에 돌아가게 된 그들의 청춘의 순간, 그곳에서 그들이 깨닫게 되는 건 어떤 것들일까.



진주는 어린아이를 둔 서른여덟 주부다. 육아와 집안일에 정신없이 지나 온 나날들에 지쳐버린 진주. 사소한 속상함과 서운함, 오해가 쌓여 남편인 반도와 이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그들 사이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둘 사이에서 애써 넘어가려 했던 깊은 문제와 오해가 조금씩 불어나,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어졌을 때, 결국 그들에게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게 되었다.



반도는 접대 회식이 끊이지 않고 아부를 필수적인 덕목으로 가져야 하는, 영업 일을 하고 있는 서른여덟 직장인이다. 수모를 견디고 숙취를 견디고 불의를 견디고. 그렇게 견디다가 결국엔 진주와 마찬가지로 지쳐버린 반도다. 정의와 자존심을 지키는 건 반도에게 소중한 일이었지만, 가장이 되고 사회에 나가면서 그걸 지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속상한 일, 억울한 일, 힘든 일에 나가떨어지고 싶을 때마다 반도를 잡아주는 건 진주와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이었다.


사실 드라마 초반부에 시청자들이 반도에게 정을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주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니, 진주에게 하는 가시 돋친 반도의 말과 행동이 굉장히 밉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무 살이 되었다고 신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열불이 치민다. 그러나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반도의 진심과 과거의 모습은 손호준 배우의 열연에 힘입어 마음에 와 닿게 되고, 우리의 닫아놨던 마음을 활짝 열어젖힌다. 진주와 반도에겐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점차 서로에 대한 감정이 변하게 된 이유와 비밀이 있었고, 부부였음에도 그들은 서로의 진심을 만나기 어려웠다. 과거로 돌아감으로써 그들이 서로의 진심을 뒤늦게 알게 되고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에 많은 부부 시청자들이 (이례적이게도 남편들까지도) 공감을 많이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드라마 <고백부부>는 마음을 자꾸 건드는 드라마였기 때문에 드라마 앞에서 눈물바다가 되기 십상이었다. 매회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드라마 속 인물들에 이입하게 되더랬다. 그래서 볼 때마다 띵해진 머리를 싸매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지만, 이 드라마는 그렇게 가슴 아플 만큼 큰 감동을 주는 좋은 드라마였다. 슬픈 에피소드를 쓸 때면 매번 한바탕 울고 시작한다던 권혜주 작가의 진심은 작품 속 수많은 명대사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언제부턴가 익숙함과 편안함에 가려져 당연시되는 것들이 있다. 내 사람의 호의도, 주어진 행복도 모두 원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당연히 여기며 우린 살아갔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사실은 누군가의 존재마저도 모두 당연한 건 없었다." (10회)


‘그 모든 것들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당연한 것들의 소중함.

이걸 뒤늦게 깨닫게 됨으로써 극 중 캐릭터들이 흘리는 사무친 눈물과 후회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우리들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진주가 스무 살로 돌아가자마자 현실에선 이미 돌아가셨던 엄마를 눈앞에서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때, 우린 무너지는 슬픔을 느끼며 엄마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반도가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진주를 그리워할 때, 그리고 진주가 익숙해져 까먹고 있던 반도의 진심을 다시 느낄 때, 우린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익숙해진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당연함을 걷어내 볼 기회를 갖는다. (반도는 진주에게 처방된 약을 무해한 것들만 골라서 다시 담아 진주에게 건넨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뜨겁고 젊었을 때 둘의 표정과 그 이후 표정의 차이가 극명히 대비되어 드러나 씁쓸했던 장면이 있었다. 열심이던 반도와 감동받던 진주. 하지만 이는 그들에게 당연한 일, 익숙한 일이 되어 더 이상의 고마움과 감동은 무뎌지게 되었다.) 드라마 <고백부부>는 우리가 뒤늦게라도 다시 알아차려야 하는 일들에 대해 말해주는, 그런 드라마였다.




감동적이고 따뜻한 메시지를 가졌다는 것 말고도 이 드라마는 모든 걸 잘 갖추고 있는 드라마였다. 먼저, 캐릭터들의 역할에 대해 말해보겠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고백부부>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서브 캐릭터들이었다. 완벽한 드라마에 가까워질 수 있는 큰 요건 중 하나가 모든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주연 캐릭터들 말고도 조연 캐릭터들에게 주연 캐릭터들 만큼의 개성과 매력, 서사가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드라마는 반짝반짝해진다. 진주와 반도의 이야기 말고도 네 명의 친구들의 이야기가 탄탄했던 게 정말 좋았고, 진주와 반도가 스무 살로 돌아가 새로 관계를 키우게 되는 남길과 서영의 캐릭터도 입체적이어서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남길과 서영에 대한 진주와 반도의 마음이 위험하지 않았던 것도 다행이었다. 무려 조카 뻘이니까 말이다!


적절하게 잘 배치된 이 캐릭터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드라마 <고백부부>의 큰 장점이었다. 진주와 반도는 최고였고, 다른 캐릭터들도 모두 찰떡이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꺼이꺼이 울게 만들었던 주범은 아마 장나라 배우가 아닐까 한다. 결혼 경험도, 출산 경험도 없는데 어쩜 이렇게 연기에 깊이가 있을 수 있을까..! 장나라 배우는 엄마에 대한 진주의 그리움과 미안함,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대단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그 옆에 든든히 있어준 김미경 배우는 얼굴만 떠올려도 울컥하게 된다. 특유의 담담한 말투와 그 안의 깊은 감정선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끝없는 오열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여담이지만, 이 드라마의 팬이었던 내 친구 H와 나는 엄마 에피소드가 나올 때마다 부모님께 잘 하자, 철없게 굴지 말자 - 하는 등의 다짐을 함께 하곤 했다. (쉽게 까먹게 되지만.)


개인적으로 손호준 배우의 연기가 굉장히 놀라웠다. 손호준 배우를 처음 알게 되었던 게 <응답하라 1994>였기 때문에, 손호준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울었던 건 그 작품 속 그 유명한 ‘무화과 잼’ 에피소드가 처음이었다. (이때도 사실, 처음부터 호감이 마구 가는 류의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이 씬 이후로 해태에 대한 애정이 샘솟기 시작했었더랬다.) 이 배우가 진심을 통해 관객들을 울릴 수 있는 배우라는 걸 알게 된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서도 손호준 배우의 연기는 너무 좋다. (아직까지도 손호준 배우가 연말에 이 드라마 속 연기로 상 못 탔다는 걸 납득할 수가 없다.) 초반부의 반도는 시청자들이 호감을 얻기엔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았던 캐릭터였기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도, 그 유명한 ‘나도 보고 싶었다고!’ 씬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의 문을 훅 열어버린다.bb 극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쉽게 볼 수 없었던 반도의 진심과 속 깊은 내면, 그리고 그의 노력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린 반도가 실은 서툴 뿐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반도 캐릭터를 호감으로 끌어주는데서 손호준 배우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는데, 덕분에, 끝까지 좋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반도는 결국 내 마음에 오래 남을 캐릭터가 되기까지 했다. (손호준 배우의 인터뷰를 빌어 말하자면) 반도라는 캐릭터는 매시간 최선을 다하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며 노력한 친구였다. 완벽하지 않지만 항상 진심을 다했던 반도. 그 진심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나서야 반도는 애처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감동적인 메시지, 알찬 캐릭터, 꽉 찬 배우들의 연기력에 더불어, 이 드라마가 말하고 있는 주제가 가족과 관련되어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부모님과 부부에 대한 감정은 익숙함에 속아 그 소중함과 진심을 자주 놓치게 되곤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안 되는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존재들인데 말이다. 너무 친해서, 너무 가까워서,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에 잊어버리기 쉬운 습관적인 소중함에 대해 말하는 <고백부부>는 다양하고 세밀한 이야기와 갈등, 사건들을 통해서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찰나의 깨달음을 선사해준다. 우리가 너무 늦지 않도록, 크게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방송 당시 마음을 후벼 팠던 OST들(‘바람의 노래’와 ‘Dream’을 들으면 바로 <고백부부> 세계 안으로 떨어져 버린다)은 한동안 내 플레이리스트에 자리 잡고 있었고, 종영 이후에도 발견되던, <고백부부> 배우들끼리의 친목은 마음을 촉촉하게 해줬다. 이 드라마를 오랫동안 아끼는 바람에 리뷰가 늦어졌다. 정말 좋았던 드라마, 누구에게든 추천할 수 있는 드라마 <고백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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