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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한 Feb 20. 2018

#3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


 #3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내가 뭐든 해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건 그 탓인지도 모르겠다.
말은 믿을 수 없지만 몸이 느낀 건 믿을 수 있다.”







3명 이상이면 들어갈 수 있는 우리학교 중도 시청각실의 그룹시청실은 내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그룹시청실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방으로, TV 스크린이 있고, 푹신푹신하고 편한 의자가 6개 놓여있다. 의자는 두 줄로 앞에 3개, 뒤에 3개가 놓여있다. 3명이 각자 뒤에 자리를 차지해 앉고선 앞줄의 의자에 짐이나 신발 벗은 발을 올려놓고 거의 눕다시피 하면 그곳은 세상에서 제일 아늑한 영화관이 된다. 그래서 3명이 가면 딱 좋은 곳.

이곳에서 본 영화가 굉장히 많다. 그중에는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 <리틀 포레스트 : 겨울과 봄>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은 좀 특이하게도 1회의 시청으로 끝낼 수가 없던 작품들이었다. 이 영화들은 여러 번 빌려야 했는데, 그건 이 아늑한 공간에서 편히 누워 앉아 이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예외없이 스르르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근데 이게 또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이라며, 굉장히 피곤한 날일지라도 우린 굳이 이 영화를 고르곤 했다.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재료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칼질 소리, 불이 타닥타닥거리는 소리, 조용히 음식을 씹는 소리에서 오는 청각적인 쾌감과, 채도 낮고 서정적이고 잔잔한 화면에서 오는 시각적인 쾌감을 즐기며 빠져들다보면 자연스럽게 미소를 깊게 지은 채 눈을 감고 있더랬다. 웃픈 사실이지만, 내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 공간에서는 이 영화를 단 한 번도 맨정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보진 못했다고 고백하겠다. 심지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굳이 그룹시청실로 가서 계절감있게 이 작품을 빌렸는데도 말이다. (친구 여럿과 나는 이렇게 스르르 잠들게 되는 게 바로 이 영화의 매력이라며 아무 죄책감없이 이 영화를 보다가 잠에 들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주인공의 사연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는 게 함정.ㅎㅎ 그게 궁금해져 집에서 이 작품을 꼼꼼히 다시 보기 시작했다. 요즘 왓챠플레이에 작품이 많아지고 있어 행복하다. <리틀 포레스트> 등록된 지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알았다. 곧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로 한국 리메이크작을 보러 가기에 앞서, 일본 <리틀 포레스트>의 모든 장면들을 놓치지 않고 보기 위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부터 차례차례 영화를 재생해나갔다.




먼저 여름 편이다. 습기 많고 온도 높은 초록초록한 이곳, 코모리가 영화의 배경이다. ‘리틀 포레스트’라고 화면에 제목을 살포시 알려주고서 영화는 시작된다. 역시나 컷들이 너무 정갈하다. 화면이 넘어가는 방식도 너무 좋다. 화려한 기법은 없지만, 간결하고 차분하다. 일본 음식처럼.




주인공 이치코는 도시 생활을 하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향인 코모리로 돌아가 자급자족의 생활을 해나간다. (첫 번째 영화에서는 이치코가 코모리로 돌아온 구체적인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는 농사짓는 장면, 자연에서 가져온 것들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반복된다. 메인은 요리. 그래서 시퀀스가 요리 별로 나뉜다. 각각의 요리 시퀀스에서는 날씨, 온도, 재료, 음식, 그 음식에 얽힌 이야기가 다르게 전개된다. 소소하지만 알차게 잘 담겨있다.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은 한 편의 영화로 개봉했지만, 독자적인 여름 편과 가을 편이 있고, 그 두 영화가 연달아 나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한 후, <리틀 포레스트 : 겨울과 봄>이 나왔으니까 여름 편, 가을 편, 겨울 편, 봄 편, 이렇게 총 네 편의 영화가 있는 셈이다. 계절에 따라 영화의 분위기는 바뀐다.




역시나 <리틀 포레스트>의 중심은 음식...♡ 내가 반한 음식들만 모아 놓았다. 이중에 유독 마음에 드는 건 잼이랑 토마토 파스타, 크림 스튜. 괜히 이 영화 보면서 소질없지만 요리를 시도해보고 있다. 오믈렛 한번 망했고, 알리오올리오 애매하게 성공했다. 그리고 한라봉 청은 지금 숙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ㅎㅎㅎ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음식만 계속 나오는 영화인 건 아니다. 굉장히 느리고 신중하지만, 분명 메시지가 차곡차곡 포함되어있다. 가령, 잼을 만드는 장면에서도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졸인 상태는 물에 떨어져 묽은 방울이 될 정도. 묽게 보여도 잼은 식으면 단단해지는 법.’


잠시 마을에 나가 같이 살았던 애인과 이별한 후, 코모리로 돌아와, 주인공은 다시 돌아온 수유의 계절을 맞는다. 그녀는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수유를 보고 그 많은 과정들이 쓸모없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너무 슬픈 것 같다며 잼을 만든다. 모든 게 끝나고 그 과정들이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묽게 보여도 식으면 단단해진다.


주인공처럼 코모리로 다시 돌아와 일을 하고 있는 주인공 친구가 있다. 왜 돌아왔냐는 물음에, 그는 직접 해보지 않고 남이 만든 걸 옮기기만 하는 사람들이 싫다며 돌아왔다고 한다. 모든 걸 직접 해보고 진짜 생각을, 진짜 지혜를 갖고 있는 코모리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다면서 말이다. 이렇게 영화는 극중 인물들의 대사나 주인공의 내레이션, 혹은 과거 회상 씬을 통해서 나름의 생각들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관객들이 유심히 지켜봐야할 중요한 인물은 바로, 과거 회상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그녀의 엄마다. 주인공의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떠났다. 그러나 첫 번째 영화에서는 이 부분보다는 엄마와 얽힌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많이 다룬다. 예를 들어, 엄마가 집에서 요리해내던 많은 음식들이 사실은 그 집 안에서 탄생한 고유의 음식이 아니었고 시중에 파는 것들을 다른 식으로 만들었던 것이었다든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그 의미를 설명한다든지 하는 것들. (ㅎㅎㅎ 엄마 너무 귀엽다.) 우리는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그녀의 엄마에 대해 같이 생각하게 된다. 첫 번째 영화에서는 그동안의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되고, 엄마의 음식에 들어간 정성을 눈치채기 시작하고, 엄마가 떠난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아직은 알아채지 못한다.




한편, 영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화면 분할을 많이 사용한다. 오프닝 제목에서부터 자주 사용하는데, 개인적으로 너무나 마음에 든다. 과거 회상 장면이 계속해서 나올 정도로 영화에서 과거의 에피소드가 중요하기 때문에, 현재의 화면과 과거의 화면을 분할을 통해서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 꽤 있다.

차분하고 정적인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에 이렇게 신선하게 활력을 주는 게 참 좋다. 이밖에도, 영화 초반에 SF스러운 화면들도 조금 나온다. 코모리의 습도에, 지느러미만 붙이면 헤엄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요하고 차분해서 주인공 혼자서 재료를 가져와 요리를 하는 장면을 주구장창 보면 영화가 끝나는 듯한 느낌이지만, 알고보면 의외로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영화다. 과거 회상 장면에서도 물론, 현재에서도 주변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지금까지는 친구 두 명과 마을 주민들, 엄마와 옛 애인이 등장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우린 주인공 이치코가 살아오면서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을 함께 만나본 것이다.

(예고편만 보고 추측해보건대, 한국 <리틀 포레스트>는 일본에 비해 좀 더 떠들썩하고 활기찬 느낌일 것 같다. 그것도 너무 좋다! 정말 기대됨. 한국은 역시 흥이 넘치는 국가니까)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주인공이 코모리로 돌아온 이유와 엄마가 코모리를 떠난 이유. 이에 대해선 <리틀 포레스트 : 겨울과 봄> 포스트에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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