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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한 Jun 13. 2018

#9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인공으로서의 공포


  #9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인공으로서의 공포




관객으로서의 공포와 주인공으로서의 공포는 확연히 다르다. 뉴스 속 누군가에게 벌어진 극악한 범죄 사례를 보며 느끼는 두려움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건,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어쩌면 날 뉴스에 나오게 만들 범죄의 밑그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찰나의 섬짓함이니까 말이다. 대사 사이의 여백과 인물들의 사실적인 심리 묘사,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연출 덕에,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끌어오는 건 다름아닌 후자의 공포다. 이런 요소들은 우리가 극중 인물들과 가깝게 느끼도록 만들고, 어쩌면 더 나아가 우리가 그들 본인이라고 착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에 방치된 가족들을 지켜보는 것을 넘어, 그중 한 명으로서 위치하게 된다.





영화에서 우리가 그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부분은 역시나 어린 아들 줄리안의 표정을 통해서다. 한껏 일그러진 표정의 줄리안은, 영화 초반에 앙투안이 아내에게 자녀들을 뺏겨 그들과의 시간을 그리워하고 갈구하는 사람이 아닌가를 혹시나 하고 헷갈려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앙투안에게서 명백하고 깊은 폭력을 행사받았다. 영화 초반 앙투안의 이야기가 오로지 본인의 주장일뿐이었으며, 그는 단지 폭력적이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근거들이 그 다음 장면부터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 사람'이라고 부르며 함께 해야하는 시간을 거부하려 하는 줄리안과 마음 졸이며 현실로 다가온 공포를 어쩔 수 없이 맞이하고 있는 가족들의 어두운 낯빛이 그 예의 일부분이다. 앙트완은 그들에게 더이상 남편으로, 아버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그를 보며 온몸을 떨고, 표정이 경직되고, 도망치려 한다.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하나 둘 터지는 가족들의 공포는 그동안 무력하게 당해온 피해를 예상하게 해줘서 더 무섭고 더 안타깝다. 가령, 누나가 벌벌 떨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라든지 가족들 모두가 시끄럽게 외치는 집밖 앙투안의 소리에 겁을 먹고 창문 아래에 숨어있는 장면이라든지 말이다.


영화는 앙트완이 그들에게 어떤짓을 해왔고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앙트완이 어떤 부류의 사람이었는지, 가족들이 얼마나 피해를 받아왔고, 그를 피하고 싶어하며, 거부하는지는 분명히 알아챌 수 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들과 함께 두려워하고 앙트완의 광기어린 폭력에 지옥을 느끼다가도, 앞집 할머니와 경찰관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잊고서 영화를 보고 있었겠지만, 잠시 몰입해 동일시했을 뿐 우린 그들 당사자가 아니라 단지 관객 중 한 명일 뿐이다. 심지어는 할머니와 경찰관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서 좌석에 앉아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관객들이다. 우린 그들의 상황을 온전히 느낄 수 없고 그들의 공포를 온전히 경험할 수도 없다. 이를 통해,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느끼는 당사자들에 대해 그동안 우리가 대하던 태도와 감정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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