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때 많이 하는 말
‘좋게 좋게 끝내자'
때로는 너무 지쳐서하기도 하는 말
좋게 좋게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가?
“너희 오빠도 이혼했어? 왜 세상 모든 오빠들은 이혼한 거야?”
친구들끼리 모여 집안 얘기를 하다보면, 각 집마다 이혼은 결혼만큼이나 흔한 집안의 대소사 중 하나가 되어버린 듯하다. 물론 여기서 ‘오빠’는 ‘언니’, ‘남동생’, ‘여동생’, ‘누나’ 등등으로 치환될 수 있는 피붙이의 대표 의미를 띤 일반명사일 뿐이다. 이혼은 특이한 일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도리어 현명한 선택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요즘 세상엔 헤어질 용기가 없어서 참고 사는 게 우둔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혼이 흔하다고 해서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이별은 대개 아픔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사탕을 나눠먹던 소꿉친구가 이사를 가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자식까지 낳고 함께 살던 부부가 이혼한다는 건 그 세월을 도려내면서 자신의 삶 한 부분도 잘라내는 일이다. 좋게 좋게? 생살에 메스를 대는 게 어떻게 좋을 수가 있을까. 이건 대형수술이다. 마취가 필수인. 그래서 이 드라마 ‘굿파트너’들이 존재한다. 좀 더 수월하게 헤어지도록 이혼을 대리해주는 이들, 이혼이라는 수술에 투입된 마취전문의들이 바로 이혼전문 변호사들이 아닌가 싶다.
이 드라마는 이혼 쪽으로는 도가 튼 파트너급 변호사 ‘차은경’과 이혼 쪽으로는 생 초짜인 신입 변호사 ‘한유리’가 온갖 소송들을 겪으며 진정한 굿파트너로 거듭나는 이야기이다.
아이가 다시 웃게 하는 것.
부모에게 동등하게 사랑받을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이혼의 완성이다.
아이가 원하는 건 자책만 하는 부모가 아니라
제 역할을 해내는 부모니까.
사실 이 드라마의 백미는 차은경이 본인의 이혼소송을 겪으며 부모로서, 그리고 변호사로서의 성장을 이루어내는 부분이다. 자신의 비서와 남편이 바람을 폈다. 사실 그걸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도리어 당당하게 눈앞에서 불륜을 저지르며 이혼을 요구한다? 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 차은경은 무너지며 분노한다. 하지만 스타변호사라도 자기 이혼에 혼자 메스를 들 수는 없는 법. 아직은 열정만 가득하고 서툴지만 어딘가 예전 자신과 많이 닮은, 그래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한유리에게 이혼소송을 맡긴다. 그녀와 함께 이 사태를 풀어 나가며 차은경은 자신이 가족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성공을 위해 질주하며 놓치고 산 게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히 딸 재희의 마음에 공감하고 그 마음을 얻어내는 한유리를 보며 차은경은 비로소 엄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다시 배우기 시작한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기 시작하며 이들은 결국 아이가 아빠를 잃지 않게 서로를 존중하며 잘 헤어지는 결말을 이끌어낸다.
실제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이혼을 하는 과정은 정말 원색적이어서 보통 부부가 원수가 될 것처럼 물고 뜯다 지칠 때쯤 끝이 난다. 요즘 한참 방영중인 ‘이혼숙려캠프’ 방송에 나오는 ‘예비이혼러’들을 보면 일상생활에서도 중간에 앉아있는 아이는 아랑곳 않고 싸워댄다. 쌍욕을 하고 몸싸움을 하고, 서로에 대한 비난을 일삼는다. 제 3자의 눈, 카메라를 통해 담긴 그 장면을 보며 사람들은 아이가 불쌍해 눈물을 흘린다.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부모일진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상처를 주는 사람도 부모다.
이혼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서로 상처주고 살 바에는 헤어지는 게 낫다. 하지만 헤어지고 난 후에도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잘 크려면 부모가 각각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똑바로 살아야 한다. 누구를 비난할 필요도 없다. 이혼이라는 큰 아픔을 겪게 한 만큼 아이들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이혼 가정에서 컸어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주변만 해도 이혼 가정에서 잘 자란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본인들이 선택해서 세상에 내놓은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웃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바로 이혼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관계의 끝은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온다.
그러나 내 손으로 해내는 끝은 누가 뭐라던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끝이란 곧 새로운 시작과 같은 뜻이라는 걸
이제 알기에 이별이 아프지만은 않다.
살다보면 이혼 뿐 아니라 ‘관계의 끝’은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온다. 사별, 사직, 이직, 전학, 이사...살면서 우리는 많은 ‘끝’을 경험한다. 그 끝을 잘 마무리하려면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순간을 잘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 말이다. 그러다보면 내 손으로 마무리하는 ‘끝’이 그 뒤에 찾아올 내 긴 인생의 작은 매듭이 될 것이고, 그것은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되어줄 것이다.
남편의 안식년동안 떨어져있게 된 우리 부부에게 주변 사람들이 질문을 한다. 결혼 20년이 넘도록 붙어있다 떨어져 살아보니 소감이 어떠냐고. 사실 아침에 함께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잘 자라고 인사할 사람이 없다는 게 낯설고 심심하기도 하지만 간만에 주어진 자유가 아주 싫진 않다. 남편도 혼자 연구할 시간이 많아서 좋다고 한다. 은근 많은 기혼자들이 사실은 대놓고 부러워하는 환경이다. 부부란 그런 것이다. 함께 하면 좋지만 떨어져 있어도 좋을 수 있는 사이.
지금 결혼생활의 쉼표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마침표와는 분명 다르다. 쉼표 다음 이어질 또 다른 시작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가 어떤 식의 끝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만든 매듭들이 마음을 단단하게 다져놓았을 터이다. 작은 매듭들을 짓는 연습이 꽤 괜찮은 인생연습이 될 것 같은 이유이다.
정답은 없어.
결혼, 비혼, 이혼 그거 다 선택이야.
우리가 잘해야 하는 거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선택을 옳게 만드는 노력이야.
그리고 그 노력을 다했다면 후회하지 않고 또 다른 선택을 하면 돼.
선택과 책임이 반복되는 거 그게 인생 아닐까?
나는 매사에 엄격한 아빠와 낙천적인 엄마가 정말 말 그대로 피터지게 싸우던 집안에서 컸다. 어느 날 엄마에게 물어본 적도 있다. “왜 아빠랑 이혼하지 않아?”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이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다. 참고 사는 게 미덕인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엄마가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제 3자는 절대 결혼생활의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아빠와 엄마는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에 책임을 지려고 끝까지 버텼던 것 같다. 각자 새로운 희망을 찾아 헤어졌더라도 그 또한 존중받아 마땅할 결정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뇌졸중을 앓고 지능이 1세가 되어버린 아빠의 재활을 손수 다 해내고 결국 거의 정상인으로 다시 만들어놓았다. 나는 엄마의 선택을 존경했다. 본인의 선택을 옳게 만든 노력을 존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머리가 하얗게 센 두 사람이 매일 잘 우린 녹차 한 잔씩을 앞에 놓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며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동행이 얼마나 아름다운 결정이었던가 생각했다. 두 분은 본인들의 선택을 옳게 만드는 노력을 했다. 그래서 아빠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날 때 엄마는 후회 없는 이별을 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이혼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란 오빠는 사실 이혼을 했다. 그 또한 중요한 게 아니다. 오빠는 본인의 삶을 옳게 만들게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이혼한 형이 국밥을 퍽퍽 떠먹는 걸 보며 남자 주인공이 묻는다.
“근데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
형은 태평하게 대답한다.
“눈물, 콧물 떨어져도 밥숟가락은 올라간다고 했다. 야, 요즘 시대에 이혼이 별거냐?”
내내 얄밉기만 하던 형이 어찌나 맞는 말을 하는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밥은 먹어야한다. 잘 헤어진 사람들이 각자 밥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