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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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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글 Jan 01. 2025

밀크캐러멜

둘째 딸을 낳고 입원해있던 첫 날 밤이었다. 큰 딸이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긴장한 표정으로 병실로 들어섰다. 혹여나 동생과 엄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질투가 나서 울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웬걸, 큰 딸은 하루 사이에 언니가 되어있었다. 눈을 깜빡이면서도 꽤 의젓한 모습으로 씩씩하게 들어섰다.


누구나 처음은 어렵다. 동생을 귀여워하기로 마음먹었겠지만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엄마를 동생과 남겨두고 다시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그런데도 웃으며 다시 손을 흔들고 나가는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외할아버지 손을 꼭 붙잡고 사라지는 아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승강기를 타고 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는데, 문이 닫히자마자 우렁찬 울음소리가 승강기를 뚫고 온 건물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꾹꾹 참던 눈물을 엄마가 눈에서 사라지자마자 쏟아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고 그래도 계속 울자 주머니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고 했다.

밀크캐러멜이었다. 외할아버지가 껍질을 까서 손바닥에 놓고 내밀자,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그걸 낚아채서 입에 홀라당 집어넣었다. 눈물의 짠맛이 콧구멍과 입까지 쳐들어왔지만 그 달콤한 맛은 엄마 잃은 허전함을 감싸 안듯 아이의 입안을 휘감았을 것이다.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 그 캐러멜을 입안에서 굴리며 콧물을 닦자 승강기 안에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그 머쓱했던 밤을 아이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유독 웃음도 눈물도 많은 큰 손녀와 외할아버지는 죽이 잘 맞았다. 나의 아빠일 때보다 큰 손녀의 외할아버지일 때 친정아빠는 더 많이 웃었다. 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을 갈 때면 열차 문이 열리는 곳에 서서 두 팔을 뻗어 큰 손녀부터 덥석 안아들었다. 길을 걷다가도 큰 손녀가 원하는 장난감은 다 사주고, 밀크캐러멜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늘 넉넉하게 주머니를 불룩 채웠다. 주로 엄마한테 혼나고 우는 큰 손녀의 입막음용이었다.

큰 딸은 어릴 때 본인을 생각해보면 까칠한 셰프 같았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본인만의 철칙이 있어서 그게 안 지켜지면 절대 용납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유치원 셔틀을 타러 나가기 전 방바닥에 그날 입을 옷을 순서대로 펼쳐놓고 입어야 하는데 엄마가 약간 손을 댔다? 양말과 속옷까지 싹 다 벗고 다시 혼자 입기 시작하는 식이었다. 친정아빠 또한 싱크대에 설거지를 하고 나면 물방울이 남아있진 않은지 손으로 문질러 보는 깔끔한 성격이었다. 본인이 정한 곳에 둔 볼펜을 누가 치우면 난리가 났고, 쇼핑을 하다가 한 눈에 맘에 드는 걸 발견하면 다른 건 더 보지도 않는 성격까지 둘은 꼭 닮았다. 그 두 사람의 중간쯤에 위치한 나는 늘 어설프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나는 지금도 설거지가 끝나면 물기를 대충 닦는다. 어차피 증발하겠지 싶은 게 내 성격이다. 둘의 구미를 맞추는 건 정말 어려웠다.

아이가 커 가면서 친정을 내려가는 일이 점점 줄었다. 여전히 아빠의 큰 손녀에 대한 짝사랑은 깊었지만, 아이의 주변은 점점 친구로 채워졌고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희미해져갔다. 그걸 알면서도, 점점 손주들이 늘어가도, 아빠의 핸드폰 초기화면은 항상 큰 손녀의 어린 시절 얼굴이었다. 어느 식당에서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보조개가 폭 들어가게 웃는 6살짜리 큰 손녀의 사진은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어떤 사진도 대체하지 못했다.  
 
친정아빠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를 때 큰 딸은 재수기숙학원에 들어가 있었다. 영혼의 단짝 아니랄까봐 코로나에 걸려 돌아가신 아빠와 같은 시기에 아이도 코로나에 걸려서 많이 아팠다. 살이 쏙 빠져서 나타난 아이는 상복이 휘휘 돌아갈 정도로 말라서는 장례식장 구석에서 문제집을 풀었다.
혹시나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아이에게 너무 큰 충격일까 봐 걱정했다. 아이가 너무 많이 울면 어쩌지?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웃으며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계속 방에 들어가 문제집을 풀었다. 묻지 말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궁금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슬프지 않은지, 너는 왜 별로 울지 않는지 나는 물었다. 아이는 당연히 충분히 슬프다고 했다. 그리고 더 말이 없었다.

장례가 끝나고 화장터에서 나는 통곡을 했다. 다들 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대기실에 혼자 앉아있는 내게 큰 딸이 다가와 책가방을 열며,
“엄마, 칸쵸 먹을래?”
하며, 말을 걸었다. 가방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과자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나는 눈물을 닦고 웃으며 칸쵸를 먹었다. 나중에 들었다. 아이가 밥을 허겁지겁 먹고 빨리 식당을 떠났다는 것을. 이 아이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참 다양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 아이는 수능과 함께 연달아 총 6개의 논술 시험을 보았다. 수리 논술은 보통 수학을 잘 하는 아이들이 준비하는 시험이다.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원했던 대학에 논술로 당당히 합격을 했다. 4명 뽑는데 수백 명이 몰려든 경쟁률이었다. 꽤 쉽게 나온 문제 덕에 학생들 대부분이 풀고 고치고도 시간이 남아 다들 엎드려 잤다고 했다. 하지만 딸은 끝까지 고치고 고쳐서 완벽하다고 생각될 때까지 풀었다고 했다. 그날따라 마치 작두 탄 것처럼 잘 써졌다고 했다. 그리고 발표 날 최초합 소식에 우리가 부둥켜안고 울 때 아이가 제일 먼저 눈물을 터뜨리며 말했다.
“외할아버지가 제일 원하셨던 대학인데, 꼭 합격소식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왜 그 몇 달을 기다려주지 않으신 걸까?”

아이는 그제야 목 놓아 울었다. 외할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저 그리워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 아이는 외갓집에 갈 때마다 외할아버지가 바랐던 그 대학을 합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보다 더 외할아버지의 바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고 있던 아빠가 시험 치는 날 아이의 손 위에 두툼한 본인의 손을 얹어준 게 아닐까. 그래서 합격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문득 그리워졌다. 병원에서 밀크캐러멜을 주머니에 불룩 넣은 채 아이의 손을 꼭 붙들고 멀어지던 그 날이. 나는 그 때 병실에서 나가던 내 아이의 뒷모습만 오매불망 쳐다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때 그 옆에 서 있던 아빠의 모습이 너무 그립다. 아빠는 아이에게 밀크캐러멜처럼 달콤한 사랑을 가르쳐 주고 떠났다. 그 달콤한 향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아이의 마음에 따뜻하게 남아서 오래도록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게 할 것 같다.

아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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