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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2플래닛을 떠나보내며

엄마, 40대 아니지?

by 소리글

몇 년 째 거의 대학병원을 집 앞 슈퍼마켓 가듯 들락거리며 살았다. 이젠 진료실에 들어가면서 나는 넉살을 떤다. “저 그만 보고 싶으실 텐데 어쩌죠? 또 왔어요. 죄송해요.” 그러면 의사 선생님은 “아이, 무슨 말씀을요. 제가 낫게 해 주지 못해서 죄송하지요.”라고 눙치며 만담을 주고받는다.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도 전우애 비슷한 게 생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도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나도 지친다. 어떨 땐 ‘이렇게 살면 뭐하나. 의사도 치료 못한다는데.’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최근엔 계속되는 항생제 복용으로 간수치가 너무 올라서 울적하다.


나는 울트라파워 긍정우먼이다. 삶이 나를 수시로 밭다리 걸더라도 넘어가지 않는다. 구르면서 기어이 재미난 일을 만들고야 만다. 그건, 통증도 참고 살아야 할 만큼 재미난 거리여야 한다. 요즘은 책도,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었다. 죽고 싶어도 목요일 밤마다 엠넷에서 방송하는 ‘보이즈2플래닛’ 아이돌 오디션을 보느라 일주일을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어젯밤 나는 파이널 생방송을 보느라 몇 시간을 TV앞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웃긴가? 웃지 마시라! 나에겐 최근 들어 가장 재미있는 날들이었다.


아이돌 오디션의 역사는 프로듀스101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로벌 아이돌 육성 프로젝트 앞에서 열광하던 국민 프로듀서들중 하나였던 내 큰 딸은 그 당시 6학년이었고, 이듬 해 중1이 되자 워너원 콘서트를 보러가고 싶다더니 내 생일 미역국을 비장하게 끓여놓고 허락을 받아냈다.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녀는 지금 성인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아이돌 팬이었느냐. 내 나이치고는 요즘 음악이나 아이돌을 좀 많이 아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들이 어디서 공연을 하고 있고, 어떤 이슈가 있는지 정도는 귀가 쫑긋 올라가 있다. 유명한 영상정도는 다 찾아본다. 하지만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그렇게까지 관심을 두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 프로그램이 내 맘에 콱 박혔을까.


우연히 애들과 이걸 함께 보기 시작했는데 보통 재밌는 게 아니었다. 한국 쪽 연습생 플래닛K 80명, 중국 쪽 연습생 플래닛C 80명, 도합 160명 중 8명의 데뷔조를 뽑는데, 하나같이 다들 데뷔가 절실했다. 그들의 사연을 보면 모두가 드라마다. 최장 11년 연습생을 한 애도 있었고, 유명기획사에서 공개 연습생으로 데뷔 직전까지 갔다 어그러져서 일반인으로 살다 나온 애들도 있었다. ‘경력직’들은 몇 년 씩 활동을 하다가 지원한 애들을 말하는데, 회사가 망해서 해체 직전인 애들을 비롯해, 대형기획사에서 만든 중국 현지 보이그룹인데 코로나로 직격탄맞고 이래저래 포기 직전에 다시 지원한 애들도 있었다. 경력직이라지만 인기를 끌지 못해 한국 식당에서 그릇을 닦고 12시간씩 고깃집 알바를 하다가 다시 꿈을 꾸러온 중국인도 있었다. 대만에서 대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에서 아이돌 되겠다고 장학금은 기부하고 군복무까지 완료한 애도 있었으니... 정말 사연 없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역시 악마의 편집으로 유명한 엠넷은 이번에도 영상들을 여기저기 짜 맞춰서 재미를 만들어냈다. 하나같이 그들의 절실한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편집으로 요기 찰싹, 조기 찰싹, 영상을 잘라 붙여 이슈를 만들었다. 소위 말하는 PD픽 애들은 더 많이 보여주고, 성장하는 캐릭터로 내세웠다. 실력도 좋고 괜찮아보이는데 통으로 편집되는 애들도 부지기수였다. 트위터에서는 자기 최애들을 살리겠다며 운동이 일었다. 어쨌든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게 PD들의 실력인가 싶었다. 10대, 20대들은 학교에서도 ‘보플(보이스플래닛의 준말)’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자기가 응원하는 애들을 위해 영상을 만들고 구원(?)운동을 벌여서 일정 순위까지 올리는 등, 옆에서 구경만 해도 가슴 속에 열기가 뜨끈하게 올라왔다.


자, 그렇다면 나는 어땠나? 예전부터 잘생기고 다 잘하는 1등에는 별 관심 없던 나는 매 라운드 탈락 위기에 있는 애들에게 그렇게 마음이 갔다. 깔딱 고개를 넘어가듯 겨우겨우 라운드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 애들을 보며 눈물이 났다. 갱년기에는 슬픈 영화 포스터만 봐도 눈물이 나는데 실제로 땀과 눈물이 뒤섞인 채 펑펑 우는 소년들이라니. 이건 너무 슬펐다. 지금까지 아이돌로 성공하고 싶어서 밤낮으로 연습하고 땀 흘리는 애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 싶었다. 합숙생활 4개월 동안 아침 집합시간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1등으로 내려오는 애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잘 생기고 춤 잘 추는 애들도 절실하기는 마찬가지고, 아이돌이라는 필드의 특성상, 외모와 끼는 기본일수는 있지만, 그래도 성실하고 착한 애들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집안 여자들은 다 어째서 탈락 위기에 처한 연습생들만 그리 응원을 하는지 대화가 아주 잘 통했다. 대개의 경우, 학교 다니는 딸들보다 내가 보플 소식은 더 빨랐다. “엄마, OO이 친구가 걔 응원하겠다고 춤춰서 올린 영상 봤어?”, “응, 봤어”, “그걸 언제 봤대?” 이런 식이었다. 나중에는 “엄마, 40대 아니지?” 소리까지 나왔다. “응, 내 친구들은 올해 50이야.”


실제 둘째딸과의 대화

여하튼 어제 파이널에서 내가 응원하는 연습생들은 거의 다 떨어졌다. 앞선 라운드에서 탈락했던 연습생들도 다 무대 아래 모여 한 마음으로 응원하며, 친구들이 TOP8에 안착하거나 탈락할 때마다 웃고 울었다. 특히 JYP에서 10살 때부터 함께 활동했던 친구가 TOP3에 등극하자 그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이미 탈락한 같은 그룹 멤버는 손까지 떨며 오열했다. “사실은 나 너 싫어하니까 다시 그룹으로 돌아오지 말고, 꼭 거기서 데뷔하라”며 농담하던, 가장 밝은 캐릭터의 연습생이었다. 가족 같은 친구를 진심으로 응원했기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같이 데뷔하자고 매번 약속하던 애들이 아깝게 한 명만 올라가면 부둥켜안고 우는데, 내가 살면서 지금껏 한 사랑은 사랑도 아니었다 싶더라! 잘생긴 남자들의 우정이 어찌나 깊은지, 10대 소녀 팬들은 헤어 나오기 힘들만도 했다. (우리 집 둘째가 결국 어제 오열을...)


아직은 대부분이 10대, 20대인 그들 귀에 이런 말이 들어올지는 모르겠다. 어떤 곳을 향해 질주해본 자는 이미 성공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몇 번이나 꺾이고 늦어져서 초조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삶은 끝까지 문을 닫아 두지 않는다. 그들에게 어젯밤은 희비가 엇갈린 인생의 가장 다이나믹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깝게 떨어진 패자도, 무대 위 가장 밝은 곳에 올라간 승자도, 마지막엔 양쪽 다 눈이 퉁퉁 부어있는 채 서 있는 모습이 그걸 말해줬다. 하지만 그 무대는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가는 관문이었을 뿐이다. 군대를 가야 해서, 현실적으로 돈을 벌어야 해서, 아이돌판을 떠나야 하는 이들에게는 녹녹치 않겠지만, 인생은 결코 끝난 게 아니다. 문을 직접 돌려 여는 자에게 기회는 또 올 것이다. 부디 기획사들이 그 앞에서 손을 뻗을 준비를 하고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고 보니, 남들에겐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면서, 나는 통증과의 지루한 싸움에서 지쳐가고 있었구나 싶다. 지난 몇 달 간 보플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어쩌면 또 떨어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들의 땀방울에 기운을 얻었고, 그 열정을 닮고 싶어졌다. 고맙다. 얘들아. 힘내자. 너희의 삶이 영화다. 그 끝은 해피엔딩. 근데 이제 방송이 끝나서 뭐 목요일 밤이 허전하겠는데 재미난 거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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