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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와 소나무

부산다녀왔습니다.

by 소리글

소나무

가을의 해변은 고요했다. 넓게 뻗은 해운대 모래사장을 걸으며 길을 냈다. 검은색 운동화 위로 하얀 모래가 부서졌다. 하필 이걸 신고 왔네. 맨발로 걷고 싶은 마음이었다. 미포항까지 걷자 땀이 배어나왔다. 10월말인데 여름은 아직 남아있었다.

스카이캡슐이라는 걸 처음 타보았다. 하늘과 바다 사이 어딘가 깔아놓은 철길 위에 내가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햇살에 부서지는 바다가 보였다. 저 속은 차고 깊고 어두울 텐데 생각하니. 수면 위에 반짝이는 물비늘이 슬픈 밤무대 가수의 옷 같았다. 바다 위로 드리워진 삐쭉대는 그림자가 끝없이 펼쳐졌다. 소나무 숲이었다. 이 풍경의 처음이 궁금해졌다. 해운대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의 문인 최치원이 소나무와 백사장이 어우러진 이곳의 경치에 감탄해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에서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 시대, 해운대에 처음 소나무를 심은 자는 누구였을까? 그는 천년이 넘은 어느 날, 처음 한 그루의 소나무를 궁금해 하는 여인이 찾아올 줄 알았을까?


스터디

함께 글을 쓰는 친구들과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한겨레문화센터 에세이 수업에서 만난 사이다. 작년 봄, 난생 처음 에세이라는 걸 배우러 갔다. 첫 날 설문지를 받아들고 난감했다.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 묻는 질문 앞에서 나는 한참 망설이다 ‘무위고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라고 적었다. 그 수업에서 다정한 선생님을 만났다. 친해진 후에 들었는데 그 답이 너무 신기했다고 한다. 그때 진심으로 나는 무위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자체로 최선을 다해 바르게 글씨를 썼다.


그 간절한 바람 덕이었을까. 우연에서 인연이 됐다. 네 명이 종강 후에도 일 년 반이 넘도록 함께 스터디를 하고 있다. 매주 목요일에 만나 써온 글을 서로에게 읽어주고 평가를 받는다. 매주 같은 장소에서, 같은 김밥을 먹으며, 열띤 토론을 한다. 무위고는 사라졌다. 하지만 건강을 잃고 난 후, 나는 일주일에 한 편의 글을 써오는 것도 버겁다. 어떨 땐 세 편을 써가고, 어떨 땐 한 편도 못 써간다. 그런데도 그들은 늘 잘 하고 있다며 나를 안아준다. 함께 여행을 할 때면 늘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했다. 걸을 때 마다 내 발목은 괜찮은지, 한 명씩 자꾸만 돌아보는 사람들. 나는 셋의 얼굴을 교대로 본다. 이번엔 그래서 내가 앞장 서 걸었다. 금방 뒤처지지만 그래도 또 열심히 힘을 내 보았다. 바닷바람이 이렇게 시원한 것이었나 싶었다.


도파민 레코드

전날 밤 LP바를 갔었다. 오래된 가정집 담벼락에 누렇게 빗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위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공들여 칠해진 ‘도파민 레코드’. 마침 가게 안에 싸인이 휘갈겨진 최백호 앨범이 보였다. 마침 스터디의 84년생 막내가 최백호를 좋아한단다. 알고 보니 그날 사장님이 광안리에서 공연한 최백호의 싸인을 받아온 것이다. 그날 밤 늦게까지 LP판이 갈아 끼워질 때마다, 바늘이 따뜻한 공명을 안고 ‘지지직’ 소리를 몇 번이나 냈고, 나는 무슨 음악이 나올까 매번 설렜다.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새삼 그 차가운 밤공기와 잘 어우러졌다. 열린 창문 사이로 서늘한 밤바람은 끊임없이 들어오는데, 모기는 뜨거운 피를 원해서 내 다리를 자꾸 깨물었다.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거하니 취기가 오른 셋과 맹물만 들이킨 내가 일어섰다. 막상 내가 물에 취한 듯 알딸딸했다. 작은 농담에도 계속 웃음이 터졌다. 다음 날 새벽, 해변 4킬로미터를 가뿐하게 뛰고 들어온 동생들과는 다르게 나는 늦은 아침까지 피곤과 싸워야 했다. 항우울제를 먹고 자면 아침에 몸이 물에 젖은 솜보다 무겁다. 공기 중에 소금기가 곁들여져 더 무겁게 느껴진 걸까. 그래도 계단 한 층 오르내리기도 버거운 이 몸뚱이로 다음 날 아침 미포항까지 걸어온 내가 대견했다.


말차빙수

스카이캡슐을 타고 청사포에서 내렸다. 일본의 어촌마을 같은 풍경을 뒤로하고 오르막을 조금 걸어올라가면 ‘심미안’이라는 카페가 있다. 60, 70년대 가옥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인테리어를 했다는데, 월요일 아침이라 텅 빈 공간이 고즈넉했다. 말차를 이용한 여러 디저트와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한껏 취해 사진을 찍어댔다. 살이 찌고부터 사진 찍히는 걸 기피했다. 그래도 몇 장 찍어봤더니, 상한 파마머리가 탈색한 듯 부스스하게 나왔다. 그림 같은 창문 밖,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세월이 느껴졌다. 내가 고레다 감독의 영화 속에 나오는 어촌의 한 촌부가 된 같았다.


해변열차

파란색 블루마린 해변열차를 타고 다시 미포항으로 돌아오는 길. 억센 경상도 억양의 직원들이 ‘미포! 미포!’ 소리를 질렀다. 꽉 찬 열차에 몸을 구겨 넣고 다시 바다와 소나무를 구경하며 돌아왔다. 서로 쳐다보며 사진을 찍어대는 동생들이 귀여웠다. 기차는 미포항에 섰고 잠시 쉬었던 발은 그새 좀 부은 듯 했다. 이번엔 천천히 걸어내려왔다. 해운대는 골목길 사이로 한 줌의 바다를 언제든 볼 수 있었다. 생선구이와 조림을 골고루 먹고 나란히 화단에 앉아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평화로웠다. 벌써 일박 이일의 꽉 찬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광안리

전날 밤의 광안리바다가 떠올랐다. 요트에서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를 보며 멀미를 해댄 시간도, 두툼한 식감의 회를 서걱서걱 씹어대던 시간들도, 다 너무 좋았는데. 막상 버스킹 하는 청년의 마이크 앞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왔었다. 애매한 재능이 가장 불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나도, 간절히 바라는 뭔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애절하게 계속 쥐고 있는 걸까. 그렇지만 내 꿈이 과연 글이 아니라 노래였더라도 버스킹 할 용기는 없었을 나를 생각하니, 그는 나보다는 훨씬 나은 인간이었다.


친구

사실 첫날 부산역에 도착해서는 오랜 친구를 제일 먼저 만났다. 중학교 시절 학원친구였다. 그러다가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과동기로 다시 만났고 절친이 됐다. 졸업하고 떨어져 산지 25년이 지났지만 만날 때마다 변한 건 없다. 언제 만나든 똑같은 너와 나다. 덜 익은 홍시처럼 겉은 반지르르하지만 떫은맛이 나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녀와 내가 졸업 후 살아온 인생은 많이 달랐다. 그런데 그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결론을 얻으며 살아왔다. 부산역 앞에서 돼지국밥을 먹으며, 친구가 “막상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는데...” 하자, “뭐 해도 안 해도 그만이지.”라는 소리가 내 입에서 툭 나온다. 기차를 타면 답답해서 숨이 잘 안 쉬어지는 탓에 서울로 못 오는 너를 만나러 내가 왔으니, 그럴 수 있으니 된 거지. 또 보자, 친구야.

글쓰기

나를 만나면, 내 글과 내가 너무 닮지 않아서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내 속에 든 걸 끄집어내는 데 아직 자신이 없다. 글을 쓰는 데 점점 더 용기가 필요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만 가득차서 풍선처럼 내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아니 독이 오른 복어 같았나.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그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그래, 천천히 가면 어떠리. 소나무 한 그루가 숲이 될 때까지 그 지난한 시간을 누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내 마음도 언젠가는 울창한 숲이 되겠지. 그 사이사이 이렇게 좋은 시간들로 나를 채워나가다 보면 또 하나의 그늘이 만들어지겠지. 그 때, 바닥에 앉아 언젠가는 내 이야기를 정말 툭 터놓고 할 수 있겠지. 서울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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