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 이야기
몇 년 전 큰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시험을 치고 난 후였다. 원래도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 애는 아니었지만 첫 시험 결과는 처참했다. 아무리 봐도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학생사주를 보는 곳에 전화를 했다. “과연 아이가 대학을 갈 수 있을까요?” 아이와 부모의 생년월일을 주면 미리 아이의 사주를 뽑아놓고, 어느 대학정도까지 갈 수 있을지, 아이의 전공은 어떻게 선택하면 될지 타고난 사주에 맞추어 상담을 하는 방식이었다. 사주로 어떻게 대학을 정한다는 건지,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 때는 절실했다. 그런데 대뜸 그 사주보는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어머니, 평소에 하늘 무너질까봐 걱정 되서 어떻게 살아요?”
순간 웃음이 팡 터졌다. 사주에 보면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엄마가 걱정이 너무 많다고 했다. 엄마가 무슨 걱정인형이냐며 온 세상 걱정을 다 끌어안고 산단다. 그 말이 너무 맞아서 순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도 나는 2시간가량 전화로 온갖 걱정을 다 늘어놓았고, 아이는 무사히 대학을 간다고 하는데도, 그럴 리가 없다며 걔 성적을 몰라서 그러는 거라며 나는 한사코 그의 말을 부인했다.
얼마 전, 그때 통화 녹음한 걸 다시 한 번 들어보고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의견을 무시할거면 뭣 하러 거기 전화를 한 건지. 나는 그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두 시간 내내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미래는 더 부정했고, 오지도 않은 아이의 대입이 이미 끝난 것처럼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3이 끝나도록 아이는 노력하는 만큼의 성적향상을 거두지 못했다. 정시러였던 아이는 논술 6장, 정시원서 3장, 도합 9번을 떨어지고 나자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누가 내 아이의 눈에 이렇게 피눈물을 나게 하는가. 나는 화가 났고 그와 동시에 내 속의 걱정인형이 슬며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 정말 어떡하지? 내 딸은 정말 안 되는 걸까? 대학 못갈 거 같다고 자꾸만 입방정을 떤 내 탓인 걸까?
아이는 기숙학원에서 재수생이 아닌 죄수처럼 1년을 갇혀서 공부했다. 스스로 원해서 가긴 했지만, 지켜보는 내 마음은 불에 덴 듯 쓰라렸다. 아이는 1달에 1번 휴가를 나올 때마다 조금씩 어른이 되어 나왔다. 항상 미안한 얼굴 표정으로 얼굴은 반쪽이 된 채 집에 들어섰다. 거기서 너무 힘들면, 정말 너무 힘들면, 매점에서 비상용으로 쥐어준 엄마카드로 간식 5만원어치 결재하라고, 그러면 바로 데리러 가겠다고 했는데, 단 한 번도 내 카드결제문자는 울리지 않았다. 대신 아빠가 원래 주던 용돈으로 아이는 매점에서 맛있게 먹었던 간식들을 매일 조금씩 사 모았다. 그리고는 먹어보라며 가방에서 수줍게 꺼내놓았다.
선생님들이 나름 심신미약(?) 상태인 재수생들에게 너희들 부모님이 얼마나 비싼 돈을 치러가며 너희를 공부시키는 지 아냐며 주입을 해댄 덕에, 씩씩하고 발랄하던 애는 늘 어딘지 모르게 기가 죽어있었다. 뭐 요즘 세상에 재수가 중죄는 아닌데, 어쩜 그리 잔인하게 단체복을 입고 새벽 6시 점호를 하며 밤까지 바깥 공기 거의 못 쐬는 감옥 같은 시간들을 보내야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온통 겨울 같은 1년을 보낸 뒤에도 결국 아이는 수능을 평소 모의고사만큼 보지 못했다. 수능성적으로 등급을 나누는 일은 도축한 고깃덩어리에 등급 딱지를 붙이듯 차갑고 무덤덤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종이 어디에도 아이의 노력은 표시되지 않았다. 혹자는 노력을 더 했으면 성적숫자로 증명할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스무 해 자식을 키워보니, 수능 성적이 꼭 밤새 공부한다고 만점을 받는 구조는 아니다. 이젠 나도 아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점차이로 수학등급이 갈렸고 공대를 지망하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물이었다.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아이는 그 당시를 되뇌이며 눈물이 나서 밥을 시켜놓고 먹지도 못했다고 이제 와서 말했다. 그리고 1년 내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논술을 준비했긴 했지만, 이젠 정말 논술밖에 믿을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날짜가 크게 쓰인 얇은 습자지 재질의 옛날 달력을 촤악 뜯어내듯, 하루하루 여섯 번의 수리논술시험을 비장하게 지워갔다. 마지막 날은 오전과 오후, 각각 다른 대학에서 두 번의 논술시험을 쳐야 했다. 도저히 내 운전으로는 오후 시험의 입실시간을 맞출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뉴스에서나 보던 학생 수송 오토바이를 검색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타보라고 웃돈을 얹어 조금 큰 오토바이를 골랐다. 아침 해가 어슴푸레 떠오르던 결전의 그날이 오고, 우리는 비장한 마음으로 나섰다. 그런데 아이가 늘 그렇듯 슬리퍼를 신는 게 아닌가.
한겨울에 슬리퍼를 신고 오토바이를 타도될까? 걱정은 됐지만 혹시나 안 되면 내 신발로 갈아 신기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내가 좀 더 단단한 워커를 신었다. 나중에 오토바이 기사님에게 물어보니 절대 슬리퍼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내가 갈아 신을 슬리퍼와 아이 입에 물려줄 삼각김밥을 샀다. 내 워커를 벗어주고 나는 슬리퍼로 운전을 할 계획이었다. 아이의 슬리퍼는 작아서 내 발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시간쯤, 아이가 약속한 후문 쪽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데 수천 명이 쏟아져 나오는 길에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너 어디니?”
“엄마 여기 후문으로 나왔는데?”
“그 쪽이 후문 맞아?”
“맞는 거 같은데...”
걱정인형이 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지금 출발해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어디냐고 나는 큰 소리로 물어댔고, 아이는 계속 후문이 맞다고만 대답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고가다리가 옆에 있는 그 대학 부속 고등학교 후문이 아닌지 걱정이 돼서 물어보니 ‘고가’가 뭐냐고 답하는 데 기가 막혔다. 아니 이런 바보를 내가 키웠나 싶고, 나의 불안은 최고조를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소리 지르며 발을 동동 거리던 그 순간, 기사님이 나의 전화를 낚아챘다.
“학생, 거기 있어요. 내가 갈게요.”
더 이상 지체하면 오후 입실시간에 늦을 판이었다. 기사님은 시동을 걸었다. 주변에서 같이 대기하고 있던 동료기사님들도 그를 말리며 길 엇갈릴 수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 기사님은 완강했다. 지금 출발해야 하니, 자기가 고가다리 옆문에서 알아서 학생을 찾겠다고 했다. 나는 차갑게 식은 삼각김밥과 내 워커를 벗어 내밀었다.
“이것들 좀 전해 주세요.”
기사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이 없다며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몇 분 뒤, 기사님은 아이를 만났다고 전화가 왔다.
“어머니,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은 아이에게 소리 지르시면 안 돼요. 얼마나 긴장했겠어요. 제가 무사히 데려다 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아셨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를 태운 오토바이가 부앙 달리는 게 저 멀리 보였다. 카키색 밀리터리 패딩을 입었던 그 기사님의 빡빡 깎은 민머리 뒤로 후광이 펼쳐져 보였다. 기사님이 수호천사처럼 느껴졌다. 나는 미안하다며 잘못했다며 부디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횡설수설을 했다. 가슴이 아파왔다. 수천 명의 수험생들과 학부모들 사이에 휩쓸려 하염없이 길을 걸었다. 주차를 해둔 곳까지 걸어가는 데 ‘이 많은 학생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눈물이 쏟아졌다. 대체 왜 대학은 이렇게 들어가기 어려운 건지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엄마! 나 잘 도착했어! 다시는 오토바이 안탈래. 너무 무서웠어!”
기사님이 엄청 달렸던 모양이다. 아이한테 자신의 허리를 움켜쥐지 말고 좌석 양쪽에 달린 손잡이를 잡으라고 했단다. 몸은 흔들리고, 오토바이는 차 사이로 칼치기를 하며 달리는데, 눈을 그냥 감아버렸다고 했다.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저씨가 “괜찮아요?” 몇 번이나 물어봐줬다며 나름 재미는 있었는지 웃는 목소리였다. 그 후에 기사님이 전화 와서는 아이가 그래도 스릴을 즐기는지, 신나게 타고 갔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걱정으로 가득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운전도 할 수 없을 만큼 손에 힘이 풀려버렸다. 운전석 시트를 끝까지 눕히고 무작정 얼굴을 가렸다. 내가 잘 한 걸까?
결국 아이는 오전에 시험을 본 고가다리가 옆에 있던 그 학교의 논술시험에 합격했다. 정시 성적으로는 못 갈 학교였다. 4명이 뽑는 시험에 수백 명이 몰려든 경쟁률이었다. 아이는 합격소식을 듣자마자 외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학교라며 울었고, 나도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이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안고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다며, 아무 생각 없이 근처 손만두집으로 달려갔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고 했다. 신호등 앞에서는 옆에 사람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미친 여자처럼 “저 대학 붙었어요!”라고 자랑하고 싶었다고 했다.
올해도 이틀 전, 수시와 논술 결과가 나왔다. 역대급 불수능으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최저를 맞추지 못해 상처를 입었고,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속상할까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도 두 해 전, 9장의 원서를 공중에 날리며 슬퍼했었다. 하지만 이미 1년이나 시간이 흐른 뒤, 지난겨울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모두가 절대 포기하지 말았으면 해서다. 수능은 7교시가 원서교시다. 정시원서 쓰는 데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내년도 있으니, 끝까지 아이들을 안아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나 같은 걱정인형도 했으니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지개가 사실은 반원이 아니라 완벽한 원형이란 사실을 아는가. 우리가 보는 무지개는 무지개의 윗면일 뿐이다. 지평선 아래 절반은 가려져 우리는 보통 저 멀리 있는 무지개의 윗면밖에 보지 못한다. 하지만 하늘 위로 아주 높이 올라가, 지면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곳까지 올라가면, 완전한 원형 무지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 높은 곳까지 아이들은 계속 올라갈 것이다. 그러니 기다려 줄 것. 끝도 없이 올라가 그들이 원형 무지개를 확인하는 순간까지 언제나 행운이 함께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