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2003년 1월 5일, 뉴스에서는 역대급 추위라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에게도 역사적인 날이었다. 살을 에는 칼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는 신이 나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들이 추운거지, 우리는 추운 줄도 몰랐다. 그리고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당시 학생이었던 남편과 바로 미국으로 들어가야 했기에 먼 곳을 갈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제주도로 떠난 지 23년 만인 어제, 우리는 단 둘이 제주도행 비행기를 다시 탔다.
요즘 우리 부부가 서로에게 바라는 거라곤 잘 때 코 골지 말고, 역류성 식도염 조심하고, 밥 먹고 난 뒤 밥그릇을 물에 잘 담그는 등의 사소한 일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이번 결혼기념일에도 별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이다. 남편이 참석하지 않았던 학회가 제주도에서 열렸는데 한 사람이 펑크를 내서 방이 남았단다. 같이 빨리 날아오란다. 그래? 그럼 가지 뭐. 결국 우리 부부는 왕복 단돈 10만원에 비행기 표를 구했고, 얼떨결에 그것이 23번째 결혼기념일 여행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나는 학회 사람도 아니니 이번 여행은 ‘따로 또 같이’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일행들과 밥을 같이 먹는 것도 좋았다. 그들은 정말 친절했다. 하지만 나 혼자 다니고도 싶었다. 그래서 어제 제주도착 후 저녁먹기 전까지 혼자 시간을 보냈다. 창밖의 산방산만 봐도 설렜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곳도 서귀포에 있는 한 카페다. 혼자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이래서 사람들이 혼자 여행을 가는 구나 싶다. 나이 50줄에 들어서서야 이걸 깨닫다니, 역시 나는 느린 인간이다. 느려도 생각이 멈추지 않았으니 좋은 거라 맘대로 믿기로 했다.
혼자 여행을 가면 나만의 보폭으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가 원하는 속도로 갈 수 있어 좋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건강에 제약이 많은 나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곳도 잘 못 걸어 올라간다. 한라산이나 성산 일출봉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나는 그런 곳을 갈 때면 일행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혼자 남아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혼자만의 시간이 좋다고 둘러댔고, 그러다보니 진짜 내가 그렇게 변했다. 파워 E성향인 내가 혼자서도 잘 지내게 된 약간은 서글픈 이유이다.
며칠 전 브런치의 진 작가, 일명 진카코가 제주 여행을 간다고 귀띔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주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난 콜을 외쳤다. 난 결혼도 얼굴 몇 번 안 보고 한 즉흥적 인간이다. 진카코는 기뻐하며 나오겠다고 했다. 약속시간? 그냥 되는 대로 보기로 했다. 나는 그녀의 가족여행을 굳이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못 오면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그러나 만날 수 있다면 또 재밌겠지. 그렇게 만나기로 한 장소가 카페 ‘숨도’였다.
‘숨도’는 서귀포시 귤림성 안에 있다. 귤림성은 공원처럼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야 한다. 아기자기한 펜션들 사이로 각종 나무와 꽃들이 잘 가꿔진 정원을 걷다 보면 카페에 도착하게 된다. 운전도 많이 했고 부츠를 신은 발목이 편치 않아 지름길로 빨리 가고 싶은데, 이 공원 전체 3분의 2를 걸어가야 카페가 마지막에 나온단다. 그래서 지도를 펼치고 최대한 빠른 길로 걷기 시작했다. 대충 빨리 카페로 가서 앉고 싶단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풍경이 심상찮다. 샛노란 하귤이 크리스마스트리 전구처럼 주렁주렁 달린 나무 옆으로 애기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 옆은 온통 동네 누렁이같이 정겨운 갈대밭이었다. 산사나무 열매들은 올망졸망 사랑스러운 게 똑 따서 입에 쏙 넣고 모른 체 하고 싶었다. 나는 그 동화 같은 풍경에 연신 발목을 잡혔다. 카메라 렌즈를 갖다 대기만 하면 모든 곳은 그림이 되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책로의 마지막에 폭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도상 그 곳이 숨도로 가는 마지막 코스였다. 막상 폭포를 만나니 그 귀여운 자태에 이게 폭포라고? 웃음이 났지만 어쨌든 다 왔다.
하귤 라떼는 시원했고 혼자 있는 시간은 달콤했다. 진카코를 기다리는 시간에 혼자 노트북을 두드리다 보니 모든 게 여유로웠다. 혼자 있는 건 외로운 일이 아니라 설레는 일이었다. 혼자 온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과 다른 건 틀린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한 것뿐이었다.
진카코는 헐레벌떡 들어왔다. 가오나시처럼 머리를 잡고 얼굴을 가린 채 수줍게 들어섰다. 나는 반가움에 그냥 그녀를 덥석 안아줬다. 불곰처럼 거대한 내 품에 작은 그녀를 꼭 안아주니 그녀는 약간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래, 이렇게 푸근한 품이 흔하진 않다. 누구든 와라. 남은 인생 프리허그 하면서 살자. 내 품이 편안하다면 누군들 못 안아주리.
우리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그녀가 써준 손편지와 선물을 받았다. 아마 손편지는 내가 일전에 ‘치카코’(문방구가 사라졌다 12편)에 쓴 내용처럼, 손편지가 사라진 세상에서 슬퍼하는 나를 위해 써준 듯 했다. 얼마 전 다른 작가님으로부터도 귀한 손편지를 받았는데 (누군지 안 밝혀서 신비감을 조성하고 싶다!! 나만 받았다!!!) 이럴 때보면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길 잘했다 싶다.
글로 만난 사람이 깊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예스’라고 답하겠다. 글은 어쩌면 사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솔직한 통로다. 타인의 밑바닥을 본 이상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연민은 공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진카코와 헤어지고 시동을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드라이브를 했다. 내 뒤로 따라오는 차가 없어서 천천히 운전할 수 있었다.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가는데 신호도 없고, 땅은 울퉁불퉁했다. 주변이 다 나지막한 담벼락이라는 게, 이곳이 제주라는 게 신기했다. 높은 담벼락이 필요 없는 제주. 다른 이를 향해 가드를 올릴 필요가 없는 이곳에서 결혼기념일의 나는 혼자서도 행복했다. 각자가 씩씩하게 혼자서도 잘 설 수 있을 때 결혼생활도 원만할 수 있다는 건 오래 살고난 후에야 깨달을 수 있는 진실이었다. 좋은 의미의 아이러니다. 그걸 다시 한 번 깨달은 나는 씩씩하게 숙소로 돌아와 남편에게 달려갔다.
결혼기념일을 꼭 함께 보내야 할까?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우리는 함께 사는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우리는 세 분의 부모님과 한 명의 형제를 떠나보냈고, 세상에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일들을 슈퍼맨과 원더우먼처럼 해결해왔다. 하늘을 날 줄 모르는 슈퍼맨과 삼각팬티를 거꾸로 입은 원더우먼이어서 어설펐지만, 그래도 우리는 전우가 됐다. 그 긴 세월동안 말하지 않아도 뒤에 서서 서로의 세상을 한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이제 나는 혼자여도 외롭지가 않았고, 그래서 오늘같은 날 선물도 기대하지 않는 당당하고 강해진 나를 확인했다. 선물? 쿨하게 퉁치자. 각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기분 좋게 돌아온 저녁, 다시 만난 남편은 여전히 웃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슈퍼맨과 원더우먼의 독립적인 결혼기념일이었다.
*이번 주 <문방구가 사라졌다>는 휴재합니다. 이 글로 대신할게요. 대신 다음 주에 에필로그를 들고 돌아올까 합니다. 새 브런치북을 연재하기 위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 보려구요. 한 주만 더 기다려 주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