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스페인의 3대 축제인 산 페르민 축제에 스며들다.
수많은 축제들이 열리는 스페인,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3대 축제로 발렌시아에서 열리는
불꽃축제 라스 파야스(Las Fallas), 발렌시아 부뇰 지방에서 열리는
토마토 축제 라 토마티나(La Tomatina), 팜플로나에서 열리는 투우 축제
산 페르민(San Fermín)을 꼽을 수 있다.
오늘의 목적지는 팜플로나였다.
우리가 까미노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
이미 팜플로나에서는 산 페르민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었고
운이 좋았던 우리는 축제가 끝나기 하루 전 팜플로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축제기간 동안 문을 열지 않는 알베르게도 있었고
꼭 하루를 묵으며 축제를 즐기고 싶다는 마음에
오늘은 걷기를 포기하고 버스를 타고 팜플로나에 넘어가기로 했다.
유난히 공허하게 느껴졌던 방의 침대 위에서 부스스 눈을 뜨고
잠시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없이 조용했던 그 공간은 어제저녁 바베큐를 먹으며
자지껄 떠들었던 숙소의 인원들이 다 나간 뒤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공허한 마음을 부여잡고 창문을 열자
재잘거리는 시냇물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고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알베르게의 주인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눈 우리는
마을 근처 버스를 타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떠나기 전 너무 좋았던 주비리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마을 거리 가운데에 서서 이곳저곳을 눈에 담았다.
순간 어제의 행복했던 기억들과 이곳에서 느낀 여유로움이
바람결에 스쳐 지나갔고, 마침내 마음속 한켠에
따듯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마을 근처 버스 정류장에는
이미 몇몇의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의 한 아주머니에게 팜플로나로 가는 버스가 맞는지
확인받고 난 우리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후 아주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버스가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럽에 온 지 어느덧 9일째.
버스를 제외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이곳에 벌써 적응을 했던 탓일까.
정류장에 서있던 아주머니들은 버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그제야 급하게 가방을 뒤적여
겨우 마스크를 찾을 수 있었고 사람들이 다 타고난 뒤 마지막으로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길을 달리고 달려 버스는
어느새 목적지인 팜플로나에 도착하였다.
버스 기사님에게 인사를 드린 뒤 버스에서 내려 짐을 찾았다.
이미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었고 흰색과 빨간색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옷을 통해 축제가 한창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거리에 세워진 동상에도 축제를 상징하는 빨간 스카프가 둘러져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은 광장을 지나 겨우 문을 연 알베르게에 찾아가
1시간을 기다란 뒤에야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본격적인 축제를 즐기기에 앞서
우리는 큰 결정 하나를 내렸다.
우리에게 남은 까미노 여정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는
덜어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알베르게에 들어가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배낭에서
까미노에 필요한 최소의 옷과 용품만을 남긴 채
모조리 빼내기 시작했다.
짐을 빼다 보니 가끔 내 것을 챙기기 위해
과한 욕심을 부렸던 적은 없었나 생각했다.
사소한 것조차 버리고 정리하는 것을 아까워하는 나는
이것저것 끌어안고 산 적이 많다.
내가 군대에서 복무를 하던 때의 일이다.
운전조교를 맡고 있던 나는 3개월 간 훈육조교도 맡은 적이 있다.
평소 애들과 자주 소통하며 친근하게 다가갔기에
몇몇의 병사들은 나에게 고민상담을 하기도 했다.
당시 학생장을 맡고 있던 병사 한 명과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간부 과정을 가르치던 나는 간부과정이 없을 때면
크레인차량 운전조교로 지원을 나갔기에
크레인 과정의 병사들과도 친했다.
상담을 온 친구는 크레인 과정의 학생장이었다.
걱정이 된 나는 병사를 데리고
특기병 행정반 앞 생활관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운전 특기로 온 병사들은 후반기 교육 기간 내에
운전시험과 별개로 적성검사를 본다.
이 검사에서 떨어지면 면허시험을 통과하더라도
운전병으로 임무수행을 하지 못하고 퇴교를 하게 된다.
이 친구가 오늘 다녀온 적성검사에서 떨어져
퇴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실하고 조교를 하고 싶어 할 만큼 열정적이었던 친구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
한동안 그 어떠한 말도 쉽사리 건넬 수 없었다.
그래도 정신을 부여잡고 이 친구의 앞으로의 군생활을 위해
이런저런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금은 무거운 마음이 풀렸는지
자신이 겪은 두 달의 군생활 이야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실 학생장처럼 대표직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훈련소에서도 대표 훈련병을 맡았기에
군생활 내내 항상 다른 훈련병들에게 모범이 보여야 된다는
강박감에 짓눌려 있었다고 했다.
그동안 참았던 게 많았는지
어느새 감정은 격해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 친구의 명찰에 새겨진 학생장이라는 글씨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잘할 수 있다며 아무렇지 않게 달아준 그 명찰이
그 친구에게 얼마나 큰 무게를 짊어지게 했는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미안했다. 그저 이 순간만큼은 남들의 시선과 짊어지고 있던 무게를 내려놓고
실컷 울어도 괜찮다는 말을 건넨 뒤
생활관 문과 창문을 꼭 닫은 채 울 수 있게 해주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 "지금은 이곳을 떠나지만,
여기를 떠나기에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분명 너를 찾아올 거야."
그 친구가 퇴교를 하고 몇 주 뒤 메시지가 왔다.
- '조교님, 저 보충대 조교 됐어요.'
문자를 확인한 나의 입가에서는 어느새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 '다행이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다.
때문에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짊어질 수 있는 무게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삶에 익숙해져 내가 짊어질 수 있는 무게를 초과하여
무거운 짐을 얹고 또 얹으면
언젠간 주저앉기 마련이다.
살다가 문득 나의 어깨가 무거워질 때, 한 번쯤은 나의 가방을 살펴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그렇게 정리한 물품을 들고 우체국으로 가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일정과 비슷하게 맞추어 보내버렸다.
어깨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홀가분해져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거리 곳곳에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거리에는 산 페르민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저마다 빨간색과 하얀색의 옷을 입고 나온 사람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에 살아 숨 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충분히 그 공간에 서서히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열린 축제라 그런지
거리에는 미소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거리 곳곳의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금 외국에 나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침 흰색 티를 입고 나온 나는 문득 이 축제에 완전히 빠져들기 위해
상점에 들어가 빨간 스카프 하나를 샀다.
목에 스카프를 둘러메고 다시 거리를 걸어가다
외국인이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한 스페인 형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간단한 호구조사를 마친 형은
우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축제 재밌게 즐기고 좋은 여행이길 바란다는 말을 건넸다.
유독 낯선 타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듣는 따듯한 말은
유난히 마음속에 더 큰 여운을 남긴다.
그렇게 마음속에 스페인의 따듯한 추억을 또 한 번 만들어가며
물에 떨어진 물감이 서서히 퍼져가듯 짙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