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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래블러 Feb 19. 2023

까미노 홀로서기 #11

Ep11.│까미노 길을 홀로 걸으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다.


막바지 축제의 열기는 우리가 자고 있던 알베르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고

덕분에 밤새 뒤척이길 반복했다.


잠에서 깰 때마다 유난히 움직이지 않던 시계를 바라보고 잠들기를 여러 번

아침 5시가 돼서야 찌뿌둥한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간단한 세면을 마치고 침대에 있던 물건을 하나씩 배낭에 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썼던 침대와 베개의 커버를 벗기자 2층에 자고 있던 동원이가 눈을 떴다.


오늘은 까미노 여정 중 처음으로 혼자 걸어가기로 했다.

산 페르민 축제의 메인인 소몰이(Encierro)는 보통 오전 10시에 시작하기에

전날 점심이 지나 팜플로나에 도착한 우리는 이 축제를 보지 못했다.

동원이는 소몰이를 꼭 보고 싶어 했지만 

나는 축제보다는 까미노를 꼭 걷고 싶다는 마음에 서로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며 억지로 갈 수는 없었다.

까미노를 걷기 전 우리는 서로에게 불만이 있을 때

과감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던 것이 생각났다.


생각보다 서운함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서로 배려하여 불만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다 보면

언젠간 곪아 터질게 뻔하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우리의 약속이었다.


까미노의 시작인 피레네 산맥을 올라갈 때는 

서로 가진 체력과 피로도가 다르기 때문에

힘들면 꼭 힘들다고 말하고 눈치 보지 않고 

쉬자고 말하자고 약속했다.

그렇게 우리는 까미노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자연스레 배워갔다.


- "그러면 우리 내일은 각자 가자. 

   나는 걸어갈 테니까 너는 축제 보고 버스 타고 오는 건 어때?"

- "좋아, 그러면 되겠다!

   그럼 푸엔테 라 레이나 알베르게 앞에서 만나자."


최고의 절충안을 생각해 낸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의 까미노 여정을 시작했다.



이른 새벽 알베르게에서 나와 신선한 공기를 한 움큼 들이마셨다.

날카로운 새벽의 공기는 밤사이 따듯하게 데워져 있던

몸 안의 이곳저곳을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고

지나간 자리에는 텅 빈 공허함만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 공허함은 까미노를 같이 걷고 있던

친구의 빈자리를 느끼는데 더없이 충분했다. 


알베르게에서 걷기 시작한 지 얼마쯤 됐을까.

팜플로나의 메인 거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축제를 열심히 즐겼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 듯 비틀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제 축제를 즐기는 내내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던 미소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약간의 긴장감을 짊어진 채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로지 나만의 속도로 걸어갔다.

이 길을 걷는 동안 왠지 모르게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과 압박감 때문에 충분히 쉬지 않고 길을 걷기 바빴다. 

오늘만큼은 까미노를 온전히 느껴봐야겠다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나는 일정이 없는 날이면 주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무작정 걸어 다니며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군대를 전역했을 때였다.

그날도 여유롭게 집에서 뒹굴거리다 문득 드라이브를 하고 싶은 마음에

차를 끌고 대전의 대청댐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댐 주변의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이 빨라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분명 급한 일이 있는 것도, 누군가 빨리 오라며 재촉을 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마냥 걷고 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여유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기 바빴고

'나 이제 뭐 하지?', '이제 뭘 준비할까?' 등의 수십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를 압박해 왔다. 


그러다 보니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을 즐기기보다 

그다음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방법과 해결책을 찾는데 급급했고

당연하게도 나의 발걸음을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순간 나에게 미안해졌다. 

나를 되돌아보며 보듬어 줄 기회도, 위로의 한마디를 건넬 겨를도 없이

너무 빠르게 달려가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새 아침을 알리는 해가 뉘엿뉘엿 떠오르고 

선선했던 아침공기는 이내 따듯해지기 시작했다. 


드넓게 펼쳐진 평원, 오늘만큼은 그늘이 없다고 찡얼 대지 않았다.

따스한 햇빛이 머리 위로 내리자 모자를 벗고 찬란한 빛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또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서 시원한 숨결을 느끼기도 했으며

길가에 피어난 해바라기 무리에게 인사를 건넨 뒤 미소를 지어보기도 했다.


물론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연신 "올라, 부엔 까미노(Hola, Buen camino)"를 외치다 보니

어느새 용서의 언덕에 도착했다.



언덕 위에 묵묵히 서있던 순례자와 나귀 모양의 조형물들이

잔잔하게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용서의 언덕은 내가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며 기도하는 언덕이다.

잠시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옮긴 뒤

조심스레 근처 바닥에 배낭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그동안 내가 미워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미움의 대상이 꼭 타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보다 빠르게 알 수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여 일궈낸 성과에 아쉬움이 남는다는 핑계로

나에게 더 많은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지 못했던 내가,

칭찬보다는 채찍질로 매몰차게 대했던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쉴틈을 주지 않았던 내가,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내가 그곳에 있었다.

조심스레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충분히 잘 해왔어. 천천히 걸어도 괜찮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미워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복수의 칼날을 갈기도 한다.

그러한 마음은 내가 정한 증오의 대상에게 복수를 하면

조금이나 편해질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칼날을 날카롭게 갈수록 그걸 마음에 품고 있는 동안

자기 자신도 더 쉽게 베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누군가를 미워하기보다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정하게 살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그 다정함은 분명 더 따듯하게 돌아올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한껏 가벼워진 마음과 반대로 아침에 햇빛을 온전히 느끼겠다는 다짐은

정오의 햇살을 만나자 순식간에 등을 돌렸다.

햇빛은 까미노 길의 수많은 여행자를 괴롭히는데 여념이 없었고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질세라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은 순식간에 눈 속으로 들어가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까르륵 웃고 있었다. 

한쪽 눈을 부여잡고 근처 수돗가로 부랴부랴 달려가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몽롱했다. 


아... 버스 타고 갈 걸...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천천히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나만의 리듬으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을 걷다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 

이미 동원이는 버스를 타고 도착했고 약

속한 알베르게 앞에서 동원이를 만났을 때

몇 년 만에 오래된 친구를 길거리에서 마주한 것처럼 한달음에 달려갔다. 

오늘 길에서 있었던 일들과 사진들을 보여주니 

어느새 알베르게의 문이 열리고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따듯한 온수로 샤워를 하는 동안 

오늘 길에서 힘들고 고생했던 순간들은

어느새 추억이라는 옷으로 단장을 마쳤다.

그리고 미처 떨쳐내지 못했던 걱정들과 못다 한 용서들을

빨랫감 위에 얹어 1층에 있던 세탁기에 넣고 같이 돌려버렸다. 


잔잔한 바람을 맞으며 엄마와 잠깐의 문자를 주고받으니 

어느새 빨래가 끝났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깨끗해진 옷을 들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따사로운 햇빛이 잘 드는 빨랫줄에 빨래를 걸기 전 

하나하나 정성스레 물기를 털며

그렇게 남아있던 마음속 주름들마저 말끔히 펴주었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되어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 겸 일몰을 보기 위해 마을 근처 강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던 잔잔한 아르가 강 위로

일명 '왕비의 다리'라고 불리는 푸엔테 다리가 길게 뻗어 있었다. 


11세기 아르가 강 징검다리를 건너던 많은 순례자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본 왕비가 불쌍히 여겨 다리를 놓았다고 하여

왕비의 다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의 풍경을 눈에 담는 내내 왕비의 심성과 온정이

그곳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유난히 따듯하고 다정해 보였다. 

그렇게 잔잔한 풍경과 함께 오늘을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하루를 정리했다. 


가깝지만 그래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순간들이 많다.

그래서 문득 나에게 집중하고 싶은 날엔

여유를 가지고 익숙함을 보다듬는 하루를 보낼 수 있길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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