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가다.
어제 피레네 산맥의 여파가 컸던 우리는
순례자들이 거의 떠난 아침 7시가 되서야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각자의 배낭을 메고 피레네 산맥을 무사히 걸어온
우리가 기특하여 상을 주고자
하나의 가방은 동키 서비스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동원이의 가방으로 무거운 짐들을 최대한 몰아넣었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알베르게를 떠나기 전
다른 순례자들의 가방이 삼삼오오 모여있던 동키 서비스존에 가방을 내려놓고
후련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알베르게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숲길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벌린 채 우리를 품어주었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에 들어와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찬란한 초록색의 색감으로 가득 찼던 여름의 스페인.
나뭇잎들은 푸르게 생기를 내뿜으며 자신을 한 껏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마침내 안쪽까지 들와
어깨 위로 포근히 내린 햇빛은 유난히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어제와는 상반된 평평하고 완만한 길.
문득 그 길을 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길을 지나갔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고 금세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갔길래 길이 이렇게 평평해졌을까?'
'이 길을 걷는 수많은 순례자들은 어떤 이유로 왔을까?'
'그 순례자들은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 길을 걸었을까?'
어느새 머릿속에 거센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풍이 있으면 태풍의 눈도 있듯
수십 개의 질문들에 휩쓸리던 나는 순간
고요한 태풍의 눈으로 들어왔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고, 이 길의 끝에서 얻고 싶은 건 뭘까?'
머릿속에 나뒹굴던 다른 질문들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고
오로지 하나의 질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쉬이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몇 분간 말없이 그저 길을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대답을 할 순 없었지만
이 길의 끝에선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길 바랬다.
그렇게 길을 걷다 텍사스에서 온 폴 아저씨를 만났다.
미국 정부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다던 폴 아저씨는
올해 12월 은퇴를 앞두고 10명이나 되는 가족들과 함께
까미노를 걷기 위해 왔다고 했다.
한국에 대해 잘 알고 관심이 많았던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아저씨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 "한국인들은 까미노를 굉장히 많이 오는 것 같아, 그 이유가 뭐야?"
아저씨의 질문에 순간 머리가 띵했다.
불과 몇 분 전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던 질문들이
다시금 뒤죽박죽 얽히기 시작했고
최대한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뗐다.
-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그들은 리프레쉬가 필요하거나 터닝 포인트를 찾기 위해 오는 것 같아요."
무사히 대화는 이어져 갔고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가족들과도 만나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뒤 또 만나자는 인사를 남긴 채 다시 우리의 길을 걸어갔다.
슬슬 배가 고파질 무렵
근처 마을의 카페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우기로 했다.
토마토소스가 잔뜩 뿌려진 토스트와 모둠 과일, 그리고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사들고 햇빛이 잘 드리우는 테라스에 앉아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물론 쎄요도 야무지게 찍었다.
주문한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살랑이는 아침 바람에 몸을 실어 날아온 꽃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쉴 틈 없이 바빴던 한국에서의 일상과는 너무 대비될 만큼
여유롭고 한가로웠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아낌없이 즐기고 싶었다.
다시 걷기 시작한 길, 길도 완만하고 배도 부르니
슬슬 주변이 더 자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길가 곳곳엔 어제보다 더 많은 쓰레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의 미간은 한없이 쪼그라들어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며 양손 가득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몇 분쯤 걸었을 까, 푸드트럭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푸드트럭 근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뒤를 돌아보니
성진이 형이 푸드트럭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반가움에 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그러는 사이 햇빛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인사를 나눈 뒤 한참을 더 걸어
드디어 오늘의 도착지인 주비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오늘 묵을 알베르게로 들어왔다.
배정받은 방에는 어제 만난 아버지와 딸, 그리고 처음 만난
현진이 누나와 한의사였던 필환이 형과도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더운 날씨 탓에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는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마을을 둘러보았다.
작은 마을이었던 주비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평화로웠고 잔잔했다.
거리의 곳곳에는 예쁘게 가꿔진 발코니와
아기자기한 상점의 간판들이 거리에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마을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던 시냇가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마을 구경을 마친 우리도 시냇가로 내려가
오늘 하루 잘 걸어준 발에게 고맙단 인사를 보낸 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가 피로를 풀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알베르게에 모여있던 우리는
오늘을 기념하고자 다 같이 저녁을 요리해 먹기로 하였다.
근처 상점에 들어가 옹기종기 모여있던 우리에게
고기를 구워 먹자며 아버지가 고기를 사주셨다.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알베르게로 들어와
우리의 성대한 만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온 삼겹살의 반을 프라이팬에 굽기 시작했고
나머지 반은 현진이 누나가 챙겨 온 볶음 고추장을 넣어
제육볶음으로 만들었다.
내가 스페인에서 삼겹살과 제육볶음을 먹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랜만에 입으로 들어온 한식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고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고기와 함께 맥주를 마시던 우리는 한참 동안 이야기 꽃을 피웠고
그렇게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깔끔하게 뒷정리를 마친 우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조용한 어둠이 깔린 방 안의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곰곰이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분명 오늘 하루 머릿속을 맴돌았던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할 순 없었지만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이 길의 끝에 서있는 나는 분명 전보다 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