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피레네 산맥 위에서 마음속에 첫 다짐을 새기다.
어젯밤 설렘에 가득 차 쉬이 잠에 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금방 잠이 들었다.
기상을 위해 새벽 5시에 맞춰놓았던
알람이 채 울리기 전에 번쩍 눈이 뜨였다.
드디어 출발이라는 설렘과 두근거림에
피곤함은 잊힌 지 오래다.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에 깔아 두었던 짐을
주섬주섬 챙겨 넣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었던 많은 순례자들은
우리와 같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고
몇몇은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었던 성진이형은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준비하여 출발하였기에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형을 배웅했다.
대부분 같은 곳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다음 목적지가 비슷하여 다시 만날 수 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생장에서 출발하여 오늘의 목적지는 론세스바예스.
총 24.2km로 평소 산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다지 멀진 않았은 거리였지만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는 힘든 코스였다.
어스름한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그렇게 우리는 힘찬 발걸음으로
오늘의 여정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들뜬 마음으로 걸어가는 동안 사진도 찍고
눈부신 풍경들을 열심히 눈에 담기 바빴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산너머에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찬란하게 비추는 햇빛은 밤 동안 차가운 공기를 온몸으로 맞은
산맥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평지이길 바라며 걷기 시작한 지 30분이 채 안되어
우리의 눈앞에 드디어 끝없이 펼쳐진 오르막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을 다잡고 오르막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보다 일찍 출발한 많은 순례자들은
저마다의 배낭을 메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길을 올라가는 도중 누군가 시원하게 먹고
길 한복판에 버려 나뒹굴고 있던 콜라병이 보였다.
순간 화가 났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길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다니는 것인가.
속으로 화를 삭이며 페트병을 집어 들며 다짐했다.
이 길을 걷는 동안 길 위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겠다고.
그것이 나의 순례길에서의 세운 첫 다짐이었다.
나는 선한 영향력을 믿는다.
분명 내가 쓰레기를 주으면 이 길을 걸으면 내 뒤에 오는
수많은 순례자들은 깨끗한 자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를 일이다. 만약 내가 쓰레기를 줍는 장면을
누군가 봤다면 내가 보지 못한 쓰레기를 대신 주울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작은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가져다줄지를 말이다.
어느덧 해는 우리의 시선보다 더 높이 올라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차가운 아침공기 때문에 입은 바람막이를
다시 배낭에 넣어두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생기가 가득 넘치던 우리의 대화는 어느새 침묵과 거친 한숨만이
그 공백을 채워가고 있었다.
이윽고 갈증이 심해질 무렵
드디어 중간에 있는 쉼터인 오리손에 도착하자마자
재빠르게 카페 안으로 들어가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애타기 기다리며 힘든 와중에도 가방에서 크레덴시알을 꺼내어
쎄요를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햇빛이 잘 드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한껏 들이켰다.
평소 치킨도 물과 마실만큼 탄산음료를 즐겨 먹지 않는 나였지만
그 순간에 마신 오렌지 주스는 한없이 청량하고 달콤했다.
그렇게 여유를 보내다 아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먼저 순례길을 갔다 온 지인은 sns로 오리손에 도착한 나의 소식을 보고
내가 지금 있는 위치에서 그 뒤로도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이건 거짓말일 거야.
분명 3시간 정도 올라왔는데 아직도 한참 남았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제야 어제 동키로 짐을 보내야 했다는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한없이 이곳에서 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걸음 한걸음 오르막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힘든 와중에도 지나치는 순례자들에게 인사는 잊지 않았다.
- "봉주르, 부엔 까미노!(Bonjour, Buen Camino!)"
서로 웃으며 오가는 인사 덕분에
그 순간만큼은 길에서의 힘듦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12시.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햇빛은
어느새 우리를 쓰러트리겠노라 작정을 한 건지
온 힘을 다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동원이와 나는 탈수가 왔다.
힘들어 주저앉은 동원이와
앉으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제자리에 서서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나의 머리 위에는
마치 우리가 쓰러지기를 기다리듯이
독수리들이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길 위에서 쉬는 빈도가 많아지고 시간이 점점 길어질 무렵
얼마 남지 않은 정상을 향해 빠르게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 "한국인이세요?"
- "네! 안녕하세요."
중년의 남성과 옆에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가 서 있었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니 아버지는 딸과 함께
순례길을 걷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멋진 가족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도 언젠간 나의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다시 올 수 있길 간절히 바랬다.
이후 도착지에서 다시 만나자는 인사와 함께
다시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드디어 오르막길의 끝인 해발 1440m에 도달한 우리는
잠시 그 순간에 머물렀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올라온
나의 두 발과 정신력에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같이 와준 동원이에게도 너무 고마웠다.
혼자였다면 아마 더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을 것이다.
즐거움도 잠시 오늘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내리막길의 시작이었다.
차라리 내리막길이 더 낫다며 빨리 내리막길이 나오길 바라던 나의 마음은
내리막을 내려가며 그 생각이 바뀌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내려가는 내리막은
오히려 다리에 힘과 균형을 더 필요로 했다.
누군가 방송에서 스타가 되기 위해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보다
되고 난 뒤 천천히 잘 내려오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알차고 열심히 살며
자신이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올라가기 바쁘다.
더군다나 내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데
내려가는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러나 올라가는 데에 너무 온 힘을 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등산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점에 올랐으면
언젠간 내려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려올 힘을 비축해 두었으면 좋겠다.
올라가는 즐거움만큼 천천히 잘 내려오는 것도 중요하니까 말이다.
드디어 오후 4시.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하였다.
입에선 미소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알베르게에 사무실에 들어가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오는 동안 땀을 너무 많이 흘린 우리는
빠르게 짐정리를 마치고 샤워를 했다.
따듯한 온수에 오늘의 피로를 씻겨 보내니
오늘 고생했던 순간들은 추억이라는 옷으로 단장을 마쳤다.
개운히 씻고 나오니 그제야 탈수와 탈진으로 인해
머리가 시한폭탄처럼 터질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빠르게 타이레놀을 먹고 단잠에 빠졌다.
2시간 정도를 푹 자고 난 우리의 몸은
다행히 원래의 상태로 회복을 마쳤다.
그제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녁시간이 지난 탓에 우리는 1층에 있는 자판기에서
먹물 빠에야와 스파게티를 사 먹었다.
이후 마당에 나와 땅거미가 드리우는 선선한 저녁 공기를 마시며
쉽지만은 않았던 오늘 하루에 마침표를 찍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