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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래블러 Mar 13. 2023

부끄러웠던 하루 #14

Ep14.│결국 나와버린 한국인의 '빨리빨리'


 스페인의 여름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길거리 곳곳에 44℃라고 적힌 전광판을 통해서 알 수 있었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들숨에서 조차 그 열기를 알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제저녁, 너무 더운 나머지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난 한국분들과

알베르게 앞 밴치에서 화채를 만들어 더위를 달래 보려고도 했지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잠을 자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해가 다 저문 밤에도 너무 더워 물병에 시원한 물을 받아 끌어안고 자기도 해봤지만

채운 물이 따듯하게 데워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잠에서 깨 물을 쏟고 새 물을 채워 넣기를 여러 번

내일은 기필코 에어컨이 있는 알베르게에서 잠을 자겠노라

악에 받친 다짐을 하고 겨우겨우 잠에 들었다.



하루 평균 20~25km 정도를 걷는 일정이었지만

오늘은 시원한 알베르게를 위해 30km를 걸어야 했기에

조금 더 일찍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발에 물집이 심하게 잡힌 현진이 누나는

결국 오늘 하루 더 로그로뇨에서 쉬며 재정비를 하기로 했고

그렇게 누나와 아쉬운 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했다. 


걷기 전 나의 발 상태도 한번 더 체크를 했다. 

어젯밤 짼 물집이 무사히 버텨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일교차가 심했던 스페인

어젯밤의 무더위 때문인지 새벽의 공기는 오늘따라

더 시원하고 반갑게 느껴졌다. 


어둠이 깔린 새벽의 까미노에는 몇몇의 휴대폰 라이트가

거리를 듬성듬성 비추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잠시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멈춰서 있던 공원에서

저 멀리 산 너머로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볼 수 있었다.

빠르게 나아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우고

다함께 일출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뿜었다.



중간쯤 걸어갔을 때였다.

물집이 잡혔던 자리에 충격을 최대한 적게 주려고 

이래저래 꼼수를 쓰며 걷다 보니 

자세가 영 좋지 못해 결국 허벅지와 골반까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과는 반대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조심스러워지고

거세게 몰려오는 고통에 어느 순간 나의 입술은 굳게 닫혀있었다.

내 마음속에 여유와 평화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막에 떨어진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애타게 찾아 헤매듯

그저 이 길이 빨리 끝나고 오늘의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기만을 바랬다.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말이 턱끝까지 차오를 무렵

드디어 오늘의 도착지인 나헤라에 도착했다. 


드디어 쉴 수 있다는 안도감에 각성을 한 듯 

이전보다 빠르게 10여분을 더 걷자 오늘 묵을 알베르게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밖의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베르게 문 앞에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두 켤레와

벤치에 누워있던 한 명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른 시간에 출발하여 빠르게 걸어왔음에도 

걷는 내내 '설마 자리가 없진 않겠지?', '자리 없는 거 아니야?'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가장 꺼내고 싶지 않았던 그놈의 빨리빨리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시원한 곳에서 잘 수 있다는 기쁨과 동시에 묘한 찝찝함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좁은 틈 사이로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기 시작했다.



우선 알베르게 앞 밴치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빠르게 신발을 갈아 신었다. 

운동화를 벗고 양말마저 벗으니 핏줄이 잔뜩 서있던 맨발이 눈앞에 나타났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간단하게 발마사지를 하고 있을 무렵 

알베르게에서 근무하시던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오셨고

문 앞에 신발을 순서대로 놓으면 2시부터 순차적으로 입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발을 집어 들어 문 앞에 가지런히 벗어 놓았다. 


이후 1시간가량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근처 바에 들어가 

마른 목을 축이기로 했다.

평소 탄산을 즐겨 먹지 않는 나였지만 

그날 마신 콜라는 이제껏 먹어본 콜라들 중 가장 달콤하고 청량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20분 정도를 남기고 다시 알베르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알베르게 문 앞에는 우리 신발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

우리보다 한참 뒤에 온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왜 줄을 세워놓은 거냐며 투덜거리며

재빠르게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한없이 야속했지만 아직 넉넉했던 알베르게였기에

우리도 여유롭게 체크인을 마칠 수 있었다.



말끔히 샤워를 마치고 시원한 에어컨을 쐬고 있으니 

오늘 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늘의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였다.

그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주위는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 나가는 차 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러다 앞에 끼어든 운전자를 향해 화를 내기 바빴던 것 같다.


숨고 싶었다. 분명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들을 가지기 위해 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다짐이 무색해질 만큼 바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한국에서의 일상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들이 아름답고 뿌듯할 

추억이 되고 더 의미 있는 성공이 될 것이다.


언제 도착하는지 보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잘 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천천히 그리고 심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나의 길을 묵묵히 가다 보면

언젠간 목표에 잘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까미노를 걸을 수 있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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