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정통 알베르게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다.
어제저녁, 그냥 잠에 들기 아쉬운 마음에
알베르게에 있던 한국분들과 함께 근처 바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출발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여름의 뜨거운 스페인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시원할 때 많이 이동하고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 5시 늦어도 6시에는 까미노를 걷기 시작했다.
그중 유일하게 어제 알베르게에서 만난 대헌이 형 만이
해가 다 뜨고 난 이후 걷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스페인의 뜨거운 열기가 힘들긴 하지만 아침 일찍 걸으면
주위의 풍경을 볼 수 없기에
덥더라도 조금 늦게 출발한다고 말했다.
반대로 이 이야기를 들은 소영이 누나는
캄캄한 새벽에만 느낄 수 있는 냄새와 온도, 분위기 등이 좋아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말했다.
정답은 없었다.
나 또한 언제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을지, 아니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나의 두 발로 걷고, 더 많이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무사히 까미노를 걷기 위해서는 마냥 욕심을 부릴
수만은 없었다. 때문에 나는 새벽의 어둠에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그 순간들조차 마음껏 즐겨보기로 했다.
새벽 5시. 이제는 적응이 되었는지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출발 전 간단하게 몸을 풀고 어김없이 새벽의 까미노를 걷기 시작했다.
어제 나눈 대화가 아직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오늘만큼은 새벽의 까미노에 서있는 순간에 조금 더 집중해서 느껴보기로 했다.
머리 위 까만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과 재잘대던 풀벌레 울음소리, 숨을 크게
들이마실 때 들어오는 푸릇한 풀내음과 살랑이는 바람까지.
항상 어두컴컴하다고 생각하기만 했던 까미노는 사실 그 순간에도
자신만의 다채로운 색을 뽐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흑백으로 가득 차 있던 그림이 수채화로 물들어가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새벽의 까미노를 한참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라도 반드시 새벽의 어스름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렇게 서서히 아침은 밝아온다.
오늘은 도네이션으로 운영되고 있던
그라뇽의 성당 알베르게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성당 알베르게는 아직까지 정통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말에
호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는 설렘을 가득 안고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체크인을 하러 들어간 내부는 마치 산속 깊은 곳에 지어진 오두막 같이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해 주던 알베르게 봉사자분들 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을 배려하고자 각 나라의 언어로 환영인사와 함께
알베르게 주의사항을 붙여놓은 게시판은
내가 이곳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느끼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성당 한켠에 매트를 깔아놓고 간단하게 짐을 풀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그동안의 까미노를 별 탈 없이 잘 걸어온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상을 주고자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거하게 먹기로 했다.
외관부터 비싸보였던 레스토랑 안에는 손님이 없어
마치 우리가 이곳 전체를 빌린 것만 같았다.
잠시 가게를 둘러보니 어느새 한 남자 직원이 인사를 건넸고 자리로 안내했다.
'그래, 오늘만큼은 돈 걱정 하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어보자!'
그렇게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대화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성당 알베르게로 돌아와
간단하게 성당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성당을 다녀 느꼈던 것이지만
아무리 더운 날에도 성당에 들어서면
항상 서늘한 공기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었다.
어렸을 적에는 이런 서늘한 공기가 가끔은 무섭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더운 여름엔 이런 서늘한 공기는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던 조용한 공기에 자연스레 차분해진 나는
의자에 앉아 그동안의 까미노를 돌아보며 간단한 기도를 마쳤다.
이후 잠깐의 낮잠을 자고 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머무르는 순례자들은 다 같이 모여 재료 손질부터
마무리 설거지까지 함께 힘을 모아 준비한다.
주방에 올라가니 이미 몇몇의 순례자들이 재료를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도 함께 재료를 손질했다.
음식이 다 만들어갈 무렵 인원수도 많고 날씨도 좋아
야외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여 성당 뒤뜰에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이후 7시에 미사를 드리고 음식을 먹기 전 간단하게 레크레이션을 진행한 뒤
함께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있으니 우리는 어느새 가족이 되었다.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그렇게 한참을 즐겁게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덧 천천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매트에 누웠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바로 이런 것일까.
매일 걷는 일정에 지칠 만도 했지만
소소한 일상을 잘 챙기는 이곳에서의 삶이 너무 좋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와 내 주변을 자주 돌아보고 함께 걸어가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평생 잊히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