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래블러 Mar 26. 2023

허전하지만 완벽한 하루 #16

Ep16.│까미노의 맛집에 푹 빠져버리다.



오늘의 목적지는 그라뇽에서 15km 떨어진 벨로라도이다.

더 걷고 싶었지만 귀국하고 두 달 뒤 참여하는

전시 프로젝트와 관련된 미팅이 잡혀 

무리하게 속도를 내어 걸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 도착할 벨로라도를 검색하다

폭립 맛집으로 굉장히 유명한 식당을 발견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오늘 저녁은 여기다'를 외치며

폭립과 곁들여 먹을 샹그리아 생각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이미 하루 평균 25km 정도를  걷는 일정에 익숙해져

15km 걷는 것쯤은 거뜬했다.


걷는 중간에 아침을 여유롭게 먹기도 하고

걷는 중간 만난 성당에 들어가 잠깐 기도도 하며

늦장을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우리는 벌써 벨로라도에 도착해 있었다. 


왠지 모를 헛헛함과 동시에 찝찝한 마음까지 들기 시작하며

오늘의 까미노가 성에 차지 않는 느낌이었다.

마음속에서는 '점심에 폭립을 먹은 뒤 미팅을 끝내고 다시 걸어갈까?' 하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지만, 가장 더운 스페인의 오후 3시를 견딜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이기적인 마음을 품을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루를 알차게 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강박처럼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항상 치열한 삶을 살아오다 보니 어느 순간 빠른 일상에

익숙해졌다는 신호인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만큼은 한국에서의 근심걱정은 생각하지 않고 

오롯이 여유를 가지고 이 순간에 집중해야겠다며 다시 한번 되뇌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문구를 마음속으로 새긴 뒤

이곳에서 만들어나갈 순간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풀장이 딸려있던 오늘 하루를 보낼 알베르게가 열리기까진

아직 3시간이나 더 남아있던 시점.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마을 이곳저곳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던 동네빵집, 집집마다 꾸며져 있던 발코니 화분의 꽃내음,

거리의 벽들에 그려진 다양한 그림들. 

오로지 그 공간에 집중하자 잡생각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은 

순식간에 단순해져 그저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동네를 다 둘러보고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있다

스르륵 잠이 들었고

시간은 어느새 알베르게 체크인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짊어지고 알베르게로 향했다. 

알베르게 주인아주머니는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쎄요를 찍어준 뒤 간단한 설명과 함께 숙소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샤워기에 따듯한 물을 틀고 샤워를 마치자 어느덧 미팅 시간이 되었다. 

노트북을 챙겨 오지 않은 탓에

부랴부랴 숙소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휴대폰으로 미팅을 시작했다.



무사히 미팅을 마치니 안도감이 몰려왔고 이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낮잠을 자고 나니 동원이가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알베르게 2층에 있던 식당에서 폭립과 오징어 튀김, 꿀대구 그리고 

샹그리아를 시켰다. 먼저 나온 샹그리아를 잔에 따라 한입 머금고 나니

오늘의 피로가 싹 풀리며 무장해제 되었다. 


우리 둘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번져갔다.

드디어 우리의 눈앞에 등장한 폭립.

이게 웬걸, 평소 뼈 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도 항상 젓가락을 사용했던 나였지만 

정말 오랜만에 손을 사용하여 먹었다. 

그만큼 너무 맛있었고 이후 차례대로 나온 꿀대구 요리와

오징어 튀김도 굉장히 훌륭했다.


평소 여행 스타일이 그 지역의 주민처럼 

일상에 스며들어 보내는 여행을 좋아했기에 

굳이 맛집을 찾지 않아도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가 먹는 것을 선호했다. 

맛있으면 훨씬 기분이 좋겠지만 맛이 없어도 

하나의 추억이고 경험이었기에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폭립을 먹고 있는 순간 

동원이의 얼굴에서 행복함을 볼 수 있었다. 

맛집에 진심이었던 동원이는 까미노를 걷는 동안

다음 날 도착할 목적지의 맛집 리스트를 추려 항상 나에게 물어보곤 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라는 성의 없는 답변을 내놓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며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내일부턴 함께 고민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샹그리아가 담긴 서로의 잔을 부딪히며 짠을 외쳤다.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알베르게에 있던 풀장의 선베드에 누워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선선한 바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고 

천천히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오늘 하루를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




작가의 이전글 함께여서 행복한 순간들 #1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