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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래블러 Apr 02. 2023

폭주 기관차 #17

Ep17.│반나절만에 45km를 걸어간 날


욕심병이 다시 도진게 분명했다.

어제저녁, 맛있는 폭립과 샹그리아에 덕분에 흥이 오른 나는

내일 버스를 타고 갈 예정이었던 길을 걸어가겠다며 폭탄선언을 했다. 


원래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지만 

오늘은 걷던 길의 절반 정도밖에 걷지 않아 체력도 쌩쌩했고

약간의 취기가 오르기도 오른 나에게 무서울건 없었다.


내일은 오늘과는 반대로 평소 걷던 길의 2배 정도인 45km.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던 동원이는 재차 나에게 물어보았지만 

각자의 까미노 방식을 인정하며 걷기로 했기에 이내 수긍하고 응원해 주었다.


새벽 2시. 모두가 잠들어 있던 그 시간에 

홀로 이층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간단하게 세안과 양치를 마친 뒤 혹여나 누군가 깰까 봐

동원이에게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조용히 배낭을 챙겨 나왔다. 


그런 나의 앞에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알베르게의 문이 굳게 잠겨있던 것이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다시금 나의 머릿속은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고

'잠금장치를 풀고 나가면 보안센서가 울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쉽사리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 나가길 기다리기로 하고 뒷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갈 길이 멀었지만 이상하게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뒷마당에 나와 잔디 위에 있던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깜깜하기만 하던 하늘에 금세 적응한 눈에는 

수없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던 별들이 끝없이 펼쳐져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에 조용히 고개를 든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의자에 앉아 별을 바라보다 

드디어 현관문 쪽에서 '철컥'하는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은 어느덧 4시. 재빠르게 잔디 위에 있던 배낭을 챙겨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 오늘의 까미노를 걷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일찍 출발했기에 오늘은 날이 밝아오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암흑으로 뒤덮인 길이 막막하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긴 동원이의 보조배터리 덕분에

마음 놓고 휴대폰의 라이트를 킨 채 걸어갈 수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 것일까.

까미노 길 위에는 그 누구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나만 홀로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듯했다. 

아침부터 다정하게 오가는 인사말들도, 웃음소리도 찾아볼 수 없는 길 위에는

간간히 도로를 지나가는 차소리만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그날은 유독 주변의 풍경이 눈에 잘 들어왔다.

늘 그렇듯 아침이 찾아오자 조용히 휴대폰 라이트를 껐다.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아래에 고정되었던 시선은 자연스레 주변으로 옮겨갔다.


길 곳곳에는 까미노를 걸어간 수많은 순례자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이 보였다.

어느 정도 산의 오르막을 올라간 내 주변에는

울창하지만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자라나고 있는 나무들과 

숲의 그늘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이 옹기종기 불규칙하게 모여있는 것 같았지만 

나름대로 공존하며 살아가기 위한 그들만의 룰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걸었지만 아직도 목적지인 부르고스는 아득히 멀리 있었다.

더군다나 그날따라 길 위에 걸어가는 순례자들도 보이질 않아

굳게 다문 입은 도통 떨어질 틈을 주지 않았다.


입에서 반가운 인사말 대신 거친 한숨만이 늘어갈 때쯤

복장부터 여행 고수의 향기를 풍기는 여행자 형을 만났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간단한 수다를 이어갔다.


특이하게 요가 매트를 들고 다니던 형은

자신이 어디든지 쉬고 싶은 곳에서 매트를 펴고 누워있는다고 이야기했다.



여행하며 다른 외국인 여행자들에게서 가장 부러웠던 점이 바로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소통하며 자신을 잘 돌보고 있었다.

걷다가 힘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쉬어갔고

목적지를 유동적으로 바꾸기도 했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쉬운 결정이지만 

나는 그게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목적지를 한 번 정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그곳에 꼭 도착해야 했고

뜨거운 햇빛을 조금이라도 덜 받아야겠다며 

긴팔과 긴 바지를 꾸역꾸역 입으며 걸어갔던 지금까지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짧은 대화 속에 여러 감정이 든 나는

근처 카페로 들어가는 형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다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침 슬슬 발이 아파오기 시작할 무렵 

눈앞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매트는 없었지만 잠시 나무 그늘 아래 배낭을 내려놓고

나무에 기댄 채 땅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늘에 있으니 살랑이는 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느껴졌고

일렁이는 바람에 휘파람을 태워 보냈다.



뜨거운 태양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말이 턱끝까지 차오를 무렵

앞서가던 한국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 '혹시 여기 고가도로 지나가셨나요?'

- '고가 도로 같은 게 보이긴 해요. 혹시 택시 타고 가셨어요?'


내가 출발한 벨로라도에서 12km 떨어진 지점에서 출발하셨기에 

당연히 앞에 계실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추월해 버린 것이다.


안도감과 동시에 고가도로 옆 풀숲에 주저앉아 몇 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 필환이 형과 아버님 그리고 딸 수현 씨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부르고스 초입에서는 

버스를 타고 중심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버스가 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카페에서

콜라 한잔을 마시며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버스가 도착했고 

우리는 다 같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르고스에 도착하여 알베르게 앞에 다다르자

먼저 도착해 있던 동원이와 성진이 형을 만날 수 있었다.


다 함께 알베르게 체크인을 마치고 시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알베르게 옆에 있던 부르고스 대성당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

급하게 사진 몇 장을 찍은 뒤 오늘 저녁에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거리에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느새 하늘에 스멀스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거리의 가로등에 하나둘씩 불이 켜질 무렵

우리는 다시 부르고스 대성당으로 향했다.


파랗던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가자

대성당은 형형색색의 다양한 불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우리의 입에선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고

그저 멍하니 휴대폰으로 동영상과 사진을 연신 찍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의 선선한 날씨와 냄새는

몽글몽글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했다. 


이 행복함이 영원하길 바라며 바라본 주변에는 이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 이상의 소중한 사람들이 옆에 서 있었다.

물론 나의 의지와 내 두 발로 여기까지 와 있었지만

혼자였다면 몇 배 아니 수십 배는 힘들고 지쳤을 것이다.


앞으로도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닌 

함께 걸어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나의 추억의  부분이 되어주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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