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나의 까미노 여정도 잘 저물어가길 바라면서.
유독 하늘이 예뻤던 하루였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배낭에 모든 짐을 챙겨 넣고
알베르게를 나온 우리는 신발끈을 조여 맸다.
큰 도시 레온의 북적이던 거리는 어제와는 다르게
고요한 바람소리만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간간히 길 건너편으로 우리와 같이 배낭을 메고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하는 여행자들이 보였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여정을 응원하며
오늘 하루도 잘 보낼 수 있길 바랬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듬성듬성 별밖에 보이지 않던 까만 하늘에는
어느새 해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파란 물감이 서서히 번져나갔고
이내 핑크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안에 동심을 꺼내고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며 "저건 빵 같아", "저건 춤추는 사람 모양인데?"하며
어린 시절 내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나에게 초딩이냐는 소리를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의 동심을 간직해
조금 더 아름다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으니까 말이다.
오늘의 도착지인 산 마르틴 델 까미노에 도착하기까지 5km가 남은 지점.
우리는 마치 타임루프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쭉, 아니 쭈우욱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길이다.
그만큼 쭈우욱 뻗어있던 일직선의 도로와 끝없이 옆으로 펼쳐져 있던
해바라기 밭은 아무리 걸어도 도저히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옆으로 시원하게 흘러가던 시냇물에
몸을 맡겨 함께 흘러가고 싶을 뿐이었다.
겨우 타임루프 같던 길에서 빠져나와
드디어 오늘 머물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시설이 깔끔했던 알베르게는 12유로에 수영장까지 딸려 있었다.
설렘에 가득 찬 우리는 우선 짐을 풀어놓고 마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마을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스토어에 들어가
음료수와 내일 마실 물 그리고 주인아주머니께서 골라주신
납작 복숭아를 사들고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우리는 곧장 간단하게 물로 몸을 적신 뒤
뒷마당에 있던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 주위로 잔디를 심으려는지 수영장과 조금의 인조잔디,
썬베드만 덩그러니 놓인 채 주위는 흙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수영장에 뛰어들어 한참을 정신없이 놀다
썬베드에 누워 뜨거운 햇살을 온전히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후 샤워를 마치고 앞마당 의자에 앉아
납작 복숭아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간간이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Hola, Buen Camino"도 잊지 않고 외쳤으며
함께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알베르게 식당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셨다.
방으로 돌아와 뒷마당 썬베드에 앉아 일기를 다 쓰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고
너무 뜨겁지 않은 잔잔한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급하게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가지고 나온 뒤
한바탕 사진을 찍고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 저물어 갔다.
아직 까미노 여정이 반이나 남았지만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출이 있으면 일몰이 있듯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의 여백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아쉬움에게
그 공간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저 차분히 저물어가는 일몰처럼 이 여정도 잔잔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잘 지나가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의 책장에
소중히 기록될 수 있길 바랬다.